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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수 Aug 01. 2018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아주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식량 생산량은 전 세계 인구를 먹이고도 남을 정도인데, 왜 기아는 없어지지 않는가?" 장 지글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네 가지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다. 

  첫번째는 현상이다. 도대체 우리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기아'라고 하는 현상은 어느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어느정도로 인간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구체적인 수치는 20세기 말에 나온 것들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략 8억~9억 정도의 사람들이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전체 국민의 35%, 동남아시아는 18%, 라틴아메리카는 14%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쳐 있다. 놀라운 것은 절대적인 수치 상으로만 볼 때 아시아가 5억 5천 정도의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분석이다. 이 현상들은 두 가지로 쪼개볼 수 있다.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가 그것이다. 경제적 기아란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라고 이 책에선 정의하고 있다. 가뭄, 태풍, 홍수 같은 자연재해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경제적 기아의 경우에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남아있지만, 구조적 기아는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 낸 재앙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세번째는 원인이다. 그렇다면 기아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지글러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다양한 원인들을 짚어주고 있지만, 이를 크게 다시 나누어 볼 때 1)환경 2)내전 3)곡물가격 조작 4)국제기구의 자금난 등등이 있다. 이 중 지글러가 가장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곡물가격의 조작이다. 세계적인 곡물회사들은 엄청난 양의 곡물을 생산하고서도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반독점적인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가격을 후려치고 있다. 심지어는 자국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와 손을 잡고 정치적 개입까지 시도하였다. 그래서 칠레의 아옌데,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 등이 군부쿠데타에 의해 희생되기에 이르렀다. 

  네번째는 극복방안이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기아를 극복해야 하고 또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태도가 전재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아옌데와 상카라 같은 사람들은 가장 대표적인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카라의 경우에는 4년이라는 짧은 집권기간 동안 엄청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결여된 채 국제기구와 선진국들의 도움에 기대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이들의 도움으로는 현상유지조차 힘겹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는 기아라고 하는 문제가 얼마나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는지 느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윤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기업의 폭력성에 분개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희망이 좌절되어버린 아프리카의 현실에 슬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역시 내가 공부하는 분야와 관련지어 이 문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에 박지향의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 이라는 책을 보고 나서부터 나는 학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정당화 하려는 논의들에 불편함을 가져왔다. 구체적인 논지를 여기서 다 요약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누군가는 착하고 누군가는 나쁘다는 도덕적 심판은 학문에서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적 태도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주장이 나의 귀에는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없다?'는 식으로 밖에 안들린다. 분명 수 많은 식민지들은 서구로부터 억압과 폭력을 당해온 역사적인 기억을 갖고 있고, 이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데 말이다. 저들의 논리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다양성'이다. 제국주의는 수 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세실로즈는 한쪽의 극단을 상징하고 글래드스턴은 또 다른 한쪽의 극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 많은 군상들이 제국주의라고 하는 총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는 ~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폭력성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일까? 난 여전히 회의적이다. 이 질문을 바꿔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지배를 과연 당시 사람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은 좋게 생각할까?" 여기에서 '일본'과 '한국'이라는 명사를 인도와 영국으로 바꿔도 좋고, 프랑스와 세네갈로 바꿔도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인도사람이나 세네갈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막상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일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글러의 논의를 읽어본다면, 기아 역시 제국주의의 유산이나 다름 없다. 심지어 23장의 제목은 "치유되지 않는 식민지 정책의 상흔"이다. 지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말았지. 유럽에서는 공업이 발달하여, 대량의 농산물을 사들일 구매자들이 있었어. 그래서 식민자의 권력자들은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유럽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즉 유럽시장에서 소비될 수 있는 작물을 경작하도록 했어. 그리하여 식민자 차드에서는 종주국 프랑스의 직물공장에서 쓸 면화를 재배해야 했지. 그리고 가나의 삼림지대인 아샨티에서는 영국의 초콜릿 공장을 위해 카카오 농사를 지어야 했고, 탄자니아에서는 사이질삼을, 부룬디와 르완다에서는 차 농사를 지어야 했어." (p148) 현재 사하라 이남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아라고 하는 재앙이 아프리카 사람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물이라면 모르겠으나, 그 재앙은 유럽의 제국주의가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낙후된 농업기술과 게으른 국민성, 이기적인 탐욕 때문에 기아와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지만, 지글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현상들이 결코 아프리카인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포스트 식민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되돌아 보게 한다. 특히 에필로그의 우석훈과 주경복의 칼럼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를 접근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맥락 안에서 비판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틀 밖에서 비판하는 방식이다. 전자는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여러 가치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에서도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에선 시장의 자율성에 맡겨놔야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분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믿음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이들은 정부 등의 시장개입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물론 신자유주의라고 해서 시장의 개입을 무조건 부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난 이들의 주장 중에서 어떤 것이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지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ㅠ 그래서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최근 '자유가 사회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누군가는 국가주의적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글러는 본문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였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굉장히 역설적인 말이지만 뛰어난 통찰이다. 지금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의 수 많은 기아들을 방치해 두는 것이 '자유의 보장'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밥을 제공하고, 쉴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자유의 보장이다. 그래야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꿈을 이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해보면, 지금 신자유주의는 보편적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특정인들의 자유만을 보장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확실히 일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우선 쉽다. 그리고 얇다 ㅋㅋ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너무나도 명확하다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학자이면서 실천가로서의 이 시대의 지성인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아래는 장 지글러가 한국에 왔을 때 했던 인터뷰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래에 링크를 달아둔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0407213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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