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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오리 Oct 28. 2022

1. 압도적인 너의 첫인상

[8개월 태백살이]

 더없이 여유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연초에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로는 도무지 하고있던 7급 시험 공부를 계속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간절함이 사라지자 포근한 침대를 두고 삭막한 도서관에 가려 하면 도무지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낮에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핸드폰을 붙잡고 뒹굴거렸고 해가 지면 퇴근한 가족들과 수다를 떨며 하루를 보냈다. 이따금 데이트나 친구와의 약속, 여행일정 같은 것들이 잡힐때야만 간신히 침대의 유혹을 떨칠 수 있었다.





평화로운 나날에 균열을 낸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송수화기,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CC BY


 "강원도 태백으로 발령나셨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 생애 한 번도 살거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곳이었다. 평생을 경기도에서 살아온 내게 강원도는 여름 휴양지로 이따금 가는 곳이었고 그나마도 강원도에서 가본 곳이라곤 강릉, 속초 같은 관광지였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게 전화를 끊었다. 곰곰이 이 말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제야 울컥 눈물이 났다.


 퇴근한 엄마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엄마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30년 가까이 같이 산 딸이 처음으로 독립하는데, 멀어도 보통 먼 곳이 아니다. 차로는 3시간, 기차로는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강원도 산골로 가는 것이다. 엄마는 며칠동안 거실 한 켠에 이삿짐을 꾸렸다. 창고에서 꺼낸 새 냄비와 접시, 마트에서 사온 빨래 바구니와 이불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놓여졌다. "딸 시집보내면 이런 기분이려나." 하며 서글픈 표정을 지으셨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영화같은 순간이 있다.


내게는 태백과의 첫 만남이 그랬다.


직접 촬영, 처음 만난 태백산


 앞으로 살 집을 구하기 위해 태백으로 행정구역이 넘어가는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아빠가 먼저 "와"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머지 가족들은 입을 쩍 벌리고 아무말도 못했다. 클 태, 흰 백. 이게 바로 태백이다 말하고 있는 듯한 태백산의 눈 쌓인 자태였다.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흰색으로 덮여있었고 그 위론 눈 안개가 구름처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1월 말이었으니 눈 구경을 거의 하지 못한 채로 3시간 가량 달려온 후였다. 정선에서 태백으로 행정구역이 넘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겨울왕국 같은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4개 정도의 집을 구경하고 마지막으로 본 곳이 사무실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지은 지 30년이 지난 구축 아파트였지만 출퇴근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었고 방 3개라는 넉넉한 크기에 월세도 저렴했다. 이러한 모든 장점들에도 자꾸만 집에서 뒷걸음질 치고 싶도록 만든 이유는 벽지와 화장실이다.


 빨간색 꽃과 연두색 잎사귀가 반복되는 연노랑 벽지가 베란다를 비롯해 집안 온 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흡사 점집에라도 들어온 듯한 강렬한 색에 눈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화장실은 철거 직전의 폐가같은 모습이었다. 변기와 세면대는 녹이 슬었고 천장은 덜컹거렸으며 타일이 여기저기 깨져있었다.

  

직접 촬영, 날 뒷걸음치게 만든 벽지

 무조건 직장과 가까운 곳이 최고라는 부모님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마지막으로 본 아파트가 낙찰됐다. 이곳에서 과연 어떤 일상의 나날을 보낼 수 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자취 생활이 본격적으로 막을 열었다. 강원도 태백의 어느 오래된 아파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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