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혜 지음 창비 펴냄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써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기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쓰지 않으면 내게 이런 과거가 있었는지조차 묻고 살다가, 쓰기 시작하면 재생버튼을 누른 듯 기억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나를 흔들어놓고, 나이 든 지금의 나를 형성했던 중요했던 기억들을 왜 이토록 묻어두고 살았나 싶어진다.
이주혜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나’가 우울증 상담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이 함께 정당 활동을 하던 여자 동료를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혼한 ‘나’는 딸과도 멀어지고 그간의 생활을 정리한 뒤 폐인처럼 살아간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우울증 상담을 받던 중 의사는 ‘일기를 써보’라고 추천한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랄까요”라는 의사의 말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글방의 홍보 문구였다.
자신의 일상을 쓰는 다른 문우들과 달리 ‘나’는 시옷이라는 인물이 겪는 어린 시절의 사건을 소설처럼 써내려간다. 주인공 이름이 왜 시옷이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시옷은… 어쩐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 생겨서요.” 50대 여성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잊고 살았던 과거의 사람들을 불러내는 일기는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37쪽)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 이후 시옷의 집과 이웃 친구인 애니의 집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 내가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계발적 성격을 담아 유행하는 것이 현재의 기록이라면, 이 소설에서의 기록은 고통스러운 지금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에 가깝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생은 내동 고단하고, 타인은 무례하고 사회는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종종 빛나는 기쁨이 있고 무지개처럼 웃어주는 친구가 있어 기억은 붙들어둘 의미가 생긴다.
53쪽
“그럴 때마다 그애가 그 아름다운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제 몫의 모욕을 감내했다는 것도. 어떤 일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