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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리 Feb 18. 2017

비참함을 증명해야 하는 비참함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뷰

평생을 성실하게 목수로 살아가던 노인이 있다. 그는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휴식 없는 노동은 당신의 심장을 완전히 망가뜨릴 것입니다.”라는 의사의 진단서를 들고 찾아간 노동지원센터. 질병수당을 신청하러 갔지만 그는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번번이 좌절한다. 다룰 줄 아는 기계라곤 낡은 카세트테이프와 구형 핸드폰뿐인 그에게 간단한 온라인 접수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관공서는 그런 개인의 사정에 관심이 없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컴퓨터가 없는 사람도, 인터넷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도 모두 온라인을 통해야 한다. 오류창만 띄워내는 모니터와 사용시간이 만료되어 꺼지는 컴퓨터. 그 앞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노인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다. 영화는 다니엘과 그가 고용지원센터에서 우연히 만난 싱글맘 케이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고들을 다룬다.   

  

영화는 감정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시종일관 그저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분투하는 다니엘의 모습과 식료품 지원 센터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케이트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담담함이 너무 현실 같아서, 관객들의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다니엘과 케이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하고 선한 사람들이다. 머리가 하얗게 샐 때까지 다니엘은 나무를 놓지 않았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남편 없이도 케이트는 꿋꿋하게 두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이 가난한 건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들이 절실하지 않아서, 그들이 제도를 악용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선량한 시민이며 더 나은 내일을 살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무자비한 벽 앞에서 계속해서 좌절한다. 질병수당 신청이 거부된 다니엘은 아이러니하게도 관공서 직원에게 구직급여를 신청하라는 말을 듣는다. 끼니조차 챙기지 못하던 케이트는 마트에서 생리대를 훔치다 걸리게 되고, 마트 경비원의 소개로 몸 파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놓이게 된다.    

 

정부는 선진 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으로 제 몫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당장 가난에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시스템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시스템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을 꾸짖고 따돌린다. 실제로 감독인 켄 로치는 기자회견에서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다”라는 발언을 했다. 영화는 통조림 캔을 던져주고 오프너는 알아서 찾으라고 뒷짐 진 사회의 잔인함을 드러낸다.   

  

복지는 모든 ‘당연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당연히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당연히 이해할 것이다”라는 가정 속에서 개인들은 하나둘씩 인간다운 삶에서 멀어져 간다. 모든 일에 당연한 것은 없다. 그게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당연함을 가정하는 선입견은 어느새 두꺼운 벽이 되어 사회적 약자들을 고립시킨다. 그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약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치부를, 수치를, 무력함을, 가난을, 눈물을 증명해야 한다. 그들의 연령, 직업, 환경, 교육 수준과 같은 중요한 변수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 치욕스러운 과정에서 약자들의 존엄성은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증명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 시스템은 그런 악순환에 빠져있는 개인들이 미시적인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국가의 시스템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다니엘의 나라인 영국의 복지 시스템은 관료주의의 원칙성에 매몰되어 있다. 영화는 ‘사람 없는’ 자본주의적 복지의 맹점을 드러내면서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케이트의 눈물을 닦아주는 다니엘의 순수한 호의와 친절. “너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어. 다 괜찮아. 너는 좋은 사람이야.” 결국 이 무자비한 시스템에서 약자들을 다시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개인의 선한 양심에서 나온다. 그것은 동시에 문명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면서도 그들을 ‘소비’의 객체로 삼지 않는다. 일반적인 매체에서 다뤄지는 가난은 늘 일정 정도의 폭력성과 선정성을 내제하고 있다. 극한의 상황을 설정하거나 필요 이상의 감정적 디테일을 나열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빈곤 포르노’에 거리를 둔다.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푸드 뱅크에서 통조림을 허겁지겁 까먹는 케이트의 모습은 먼 쇼트에서 담긴다. 거리를 두는 시선 속에서 극적인 묘사는 절제된다. 자극적인 이미지 없이도 관객들은 여기에 몰입된다.     


결국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건 물질적인 시혜가 아닌, ‘존엄’이다. ‘존엄’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존엄한 삶을 살기 위해선 그 속에 있는 개인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온기 어린 시선이 필요하다. 그것이 복지제도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도록 종용받던 다니엘은 결국 너무 큰 비참함에 빠진다. 사람이 없는 복지는 사람을 도울 수 없고, 외려 사람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린다. 비참함을 피하기 위해서 나의 비참함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관료주의에 빠진 복지와 그 속에서 지워지는 약자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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