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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리 Feb 24. 2017

끝, 그 너머에 있는 것

- 영화 <컨택트> 리뷰 -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예지 능력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주로 미래를 알게 된 주인공이 어떤 선택으로 앞으로의 상황을 변화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어바웃 타임>이 그랬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그랬다. 하지만 컨택트는 주인공이 미래를 보게 되고 그 미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 비행물체가 전 세계 곳곳에 자리 잡는다. 세계는 거대한 혼란에 빠진다.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언어학자 루이스는 물리학자 이안과 팀을 이뤄 외계인들과의 소통에 나선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외계인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 그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언어 체계로 대화는 쉽게 진전되지 않는다. 묻기 위해선 상대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인 ‘햅타포드어’를 분석하고 습득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루이스는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들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는 ‘언어결정론’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언어결정론’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결정된다는 언어학 이론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언어는 선형적으로 쓰여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지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여지든 결국 그 방향은 일방향적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고는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과 같이 선형적으로 펼쳐진다. 반면 루이스가 소통하고자 하는 외계인들의 언어, ‘햅타포드어’는 ‘비선형적 언어’이다. 문장의 시작과 끝이 없고 원형으로 이어진 모습을 띄고 있다. 그들에게는 시작이 곧 끝이고, 죽음과 탄생은 맞닿아 있다. 햅타포드어를 습득한 루이스의 사고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과거와 미래가 잔상처럼 보이고 예지몽을 꾸기도 한다.


<컨택트>의 첫 장면은 루이스가 불치병에 걸린 어린 딸을 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장면 이후 루이스의 독백이 이어진다. “이제 나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어.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할 테니까. 그들이 도착한 날부터 시작된 이야기들처럼 말이야.” 영화의 도입부와 종반부는 수미상관을 이룬다. 영화의 스토리를 풀어가는 중요한 키워드인 한나(HANNAH)라는 이름은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같은 대칭어다. 딸의 첫 탄생을 맞이하는 장면과 딸을 죽음으로 잃는 장면에서 나오는 루이스의 대사 역시 “Come back to me."로 동일하다. 영화는 처음과 끝이 결국 원처럼 맞닿아 있음을 말한다. 죽은 딸과의 추억은 미래가 되고, 딸의 아버지가 되는 물리학자 이안과의 만남은 현재이자 과거가 된다. 영화의 서사 형식 자체가 바로 외계인들의 시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한다.


지금껏 외계인을 소재로 한 영화들의 주요 서사구조는 외계 존재와 인간의 갈등을 그려냈다. 하지만 <컨택트>는 대부분의 SF 영화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던 언어 소통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지금껏 본 적 없던 영화의 내용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컨택트>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건 무력도, 계략도 아닌 ‘소통’ 그 자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모두의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극 중에서 인간과 외계인의 소통은 2:2 팀으로 이뤄진다. 비협조적인 팀원을 빼면 안 되냐는 루이스의 불평은 “우린 모두 한 팀”이라는 말로 저지된다. 전쟁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루이스, 외계인, 중국의 샹 장군에겐 모두 상실의 아픔이 있다. 루이스는 딸을, 코스텔로는 에봇을, 샹 장군은 아내를 잃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상실을 통해 교감한 그들은 신뢰를 회복하고 협력함으로써 모두의 이익을 달성한다. 협력은 누군가가 포기하고 희생한 만큼 다른 누군가나 전체의 이익이 증가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결국 모두에게 이로운 ‘논제로섬 게임’이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논제로섬 게임’은 바로 사랑이다.


이미 미래에 도달(Arrival)해 있는 루이스는 이안과 이혼하고 딸 한나를 불치병으로 잃게 될 줄 알면서도 앞으로의 삶을 고스란히 순례자처럼 밟아나간다. 그 모든 결정이 결국 루이스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애초에 낳지 않았더라면 슬픔도, 고통도 없었을 어린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 그 병은 막을 수가 없어. 네 수영실력이나 글솜씨 같은 모든 놀라운 재능처럼 난 막을 수 없어.” 결국 루이스에게 삶이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파도 그 모든 게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끝이 어떻게 되든, 이 모든 순간은 사랑이었고 이것이 누구도 한쪽의 손해 덕에 이득을 보지 않는 완전한 논제로섬 게임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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