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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Cumi Apr 03. 2020

지금 여기서 낯설다

예민함을 발하며 깨어있는 사람이 되려면? 생소함과 낯섬의 가치

 정보사회에 대한 담론을 나누는 강의 시간이었다. 정보사회를 보는 다른 관점들 전환론적, 연속론적, 구조론적의 차이점, 기술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주장한 여러 학자들 앨빈 토플러, 하버트 쉴러, 앤소니 기븐 등. 그리고 이어지는 키워드,  4차 산업 혁명, 자율자동차 그리고 인공지능(AI) 까지.  늘 질문이 많은 Y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물었다. “미래에는 진짜 영화 터미네이터 처럼 AI가 인간을 침략할 거 같아요?” 우리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였고, Y 교수님은 ‘이건 실화인데...’ 라고 흘리며 이야기꾼처럼 말씀하셨다.


 “AI 개발자들이 직접 AI에게 물어봤대요. 너희들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인간을 침략할 거니?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랬더니, AI가 이렇게 대답했대요. 우리는 절대 침략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인간을 보호하며 잘 지켜 줄 거예요. 마치 동물원을 운영하는 것 처럼요. ” 


 AI 에게 이 대답을 들은 개발자들은 당장 딥러닝 기술 개발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후문이다. 과연 그랬을까? 문제는 이야기의 진위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움을 빼앗길 수 있는 디스토피아의 가능성이 점점 두려움으로 차오른다는 것. 기술발전은 개인적 차원에서 막을 방도가 없으며, 앞으로 고도로 기계화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나가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낀 것은 우리들의 진로에 대한 중요 문제에 대해서는 AI에게 절대 물어보면 안 될 거 같다. AI가 그것을 이용해서 인간들을 조종할지도 모르니까. 


 그럼 어디다 물어야할까, 인간이 인간답게, 내가 나답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생각 없이 살다간, AI가 운영하는 인간 동물원의 평범하고 원만한 모범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영화 WALL-E (월-E)에서 나온 온종일 의자에 누운 채로 살아가서 온몸이 동그래진 인간들처럼 말이다. 그 둥근 머리속엔 고유성, 능동성, 자발성 이란 단어는 없어보인다.   


영화 < WallE > 중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 본질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명확하게 말하는 동시대의 한국인 철학자가 있다. 바로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최진석이다. 그가 말하길, 세상엔 인간이 만들지 않은 자연과 인간이 만든 문명이 있고, 인간이란 문명을 만드는 행동, 문화적 존재이다. 즉, 인간이란, 무언가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인간의 격이 두 개로 나뉜다. 무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사람, 이미 만들어진 변화를 수용하는 종속적인 사람. 


 최진석 교수의 강의법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분절해 가며 중심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분법적 화법은 늘 질문하는 Y 교수님을 포함해 유독 선생님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나의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심히 매사가 그러셨다. 예를 들면, 교실의자를 소리 나게 막 끌어서 시끄럽게 방해하면 좋겠어? 소리 안 나게 살짝 들어서 옮기는 게 좋겠어? 이런 식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거 보면 이러한 교수법은 꽤 효과 있는 레토릭인 거 같아 나도 한번 취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변화를 야기하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게 좋겠는가, 남이 만든 걸 수용하는데 급급한 사람이 되는 게 좋겠는가?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고 강연을 보고, 거기에서 받은 좋은 자극으로 ‘깨어있는’ 눈빛이 되어 우리들만의 고유한 something(꿈)을 이루려고 하니까 말이다. 그 방법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파되어 있는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최진석 교수의 책중에 가장 으뜸이라 생각되며, 스테디 셀러에 들 가치가 있는 보물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페이지를 펼쳐보자. 그곳엔 술로  ‘떡’이 되어 이름도 촌스러운 ‘노고산 여인숙’에서 친구들과 떼 잠을 자고 나온  대학생 최진석이 있다.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고,  아침 8시 반에 집으로 기어들어가는 장면이다.  보통은 학교로 등교하는 일상인데,  ‘마치 역류하는 연어처럼’ 집으로 향하는 길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익숙한 골목길, 단지 방향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평소와 같은 시간이지만 그곳은 거기가 아닌, 생소함이, 낯섬이 당도해 있는 느낌. 


 “ 그런데 그 낯섬과 생소함이 이상하게 내 감각을 예민하게 깨웁니다. 그래서 그동안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입니다. 길 양 옆 시멘트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새에 뿌리를 박고 친구들과 함께 겨우 버티고 있는 이름도 없는 잡초들... ” - 239P


 내가 생각하는 장소적 생소함과 낯섬은 두 가지 차원 정도였다. 새로운 여행지에서 일상적인 분위기와는 확 다름이 느껴질 때 (반면 비슷함을 느끼면 기시감이라 한다), 또는 오랜만에 간 곳에서 기존 내 기억과 확 다름이 느껴질 때 나오는 반응. 즉, 원래 기존의 관념이 있고, 그것과 비교해서 다름이 생성될 때 낯섬, 생소함이 느껴진다. 만약 기존의 관념이 없는 진짜 100% 새로운 곳에 가면 어떨까? 그것은 생소함의 정도를 넘어서 공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비교할 관념들이 많기에 거기와 여기의 다름을 발견할 능력이 발달하여 계속 낯섬과 생소함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감을 간직하며 사는 경향을 보인다. 

 문제는 사랑도 기쁨도 루틴해지면 당연해지고 우리 뇌는 그 부분은 과감히 생략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은 바로 무감각으로 처리된다. 사는 게 시시하고 다 똑같다고 느껴져 온갖 심드렁함이 가득할 때, 그 기분은  내안의 두려움(우리를 심하게 보호하려 하는 경향)에서 파생된 그물일 뿐이다. 그것을 끊어내고, 깨어나는 것. 그때 필요한 칼날 중에 하나가 바로 낯섬, 생소함의 자극이다. 일단 끊어내야 뭐든 하고자하는 의지가 생기게 되니까 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평소 품은 낯섬에 대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진석 교수의 일화 덕분에 장소에 대한 낯섬의 차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낯섬. 그 방법은 일상의 공간에 다른 시간성을 입히거나, 일상의 시간 속에서 다른 공간성을 입히는 시도이다. 그러면, 평소 익숙했던 감각이 다시금 낯섬과 생소함으로 소생될 수 있다고 한다. 


“ 보통 때라면 눈에 들지 않았을 사소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 239P 


 이 페이지를 읽고, 따라쟁이인 우리*는 밤새 술을 마시고 외박한 뒤, 집에 기어들어오는 아침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요리 레서피를 따라하듯 진짜 어떨지 궁금해서 그랬는데, 몸 상태의 난조로 그런 예쁜 낯섬은 없었다. 추함에 가까웠다. 정신은 육체에 담겨있기에 그 그릇이 깨지면 정신은 바닥을 친다는 것도 다시금 알았다. 

 하지만 이 페이지는 종종 문득문득 생각나서 일상 속에서도 낯섬을 캐내고자 이것저것 시도해본다. 그 중 진짜 확실한 것은 '뒤로 걷기'라고 말하련다. ‘진짜진짜 생소해진다’ 

우리 동네에는 정복하는데 30분정도 걸리는 귀여운 매봉산이 있다. 그 산 밑에는 300m 길이의 산책로가 있는데, 운동선수용 트랙처럼 자주색 스폰지가 깔려 있어 아침마다 조깅할 때 푹신하다. 어느 맑은 날, 러닝을 마치고 트랙을 거꾸로 걸어가 봤다. '어머!? 왜 이렇게 힘들지' 란 생각부터 시작해서, 내 그림자가 뒤로 가는 것이 생소해서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시선이 옆쪽으로 가다보니, 곁에 있는 것이 도드라져 보인다. '꽃봉오리들이 아까도 있었나? 길가에 이렇게 많은 나무들이 있는지도 몰랐네'. 제일 놀라운 것은 소리다! 별빛이 쏟아지듯 여기저기에서 소리가 터진다.  아침은 알다시피 새들의 콘서트 장이다. 수컷 새들이 자기 짝을 찾기 위해 경쟁적으로 독창적으로 짹짹 거리는 현장. 뒤로 걸으니까, 그 소리가 퍼지는 게 아니라 그 소리를 내가 품으면서, 담으면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왜 그럴까? 시각과 청각의 방향이 바뀌어서 생긴 감각 같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 보면서 내가 그 소리가 쏟아지는 걸 받아내는 기분. 그 소리들은 멀어지지 않고, 복리로 누적되면서 다가온다. 마치 움직이는 써라운드 스테레오 같다. 그 소리들에 예민해지면서  이 작은 산도 많은 동물들이 사는 서식처구나를 체감했다. 이게 책에서 읽은 생태감수성일까? 


 또 문득, 어느 맑은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항상 가는 큰 길이 아닌 다른 골목쪽으로 들어가봤다. 옥수동에 이사 온 지 5년이 넘었지만, 빨리 저녁을 해먹을 생각에 늘 재촉하며 큰 길로 다녔고, 샛길들은 아마도 막다른 골목이겠지 하며 구경조차 안했다. 재개발이 된 아파트로 이주한 주민들은 새 동네에 적응하기 바빠, 그 구석구석까지 알아볼 여유가 없이 루틴해진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지만, 원래 살았던 원주민이 가지는 동네에 대한 애착, 향수는 느낄 수 없는 거 같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처음으로 발 딛는 재개발이 안 된 골목길. 못 보던 커다란 개가 짖고, 두리번 거리니, 거주자 우선 주자구역에 차들이 참 가지런하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괜히 집 문을 두드리고 싶은 충동을 접으며 돌아 나왔더니, 우리 아파트가 있는 큰 길 방향으로 가파른 계단 길이 두 개나 있었다. 포르투갈의 포르투 여행에서 보았던 낡고 가파른 계단 같았다. 동호대교를 기준으로 하나는 왼편으로,  또 하나는 오른 편 방향으로 나가는 계단이었다. 우리는 조금 덜 가파르게 보이는 동호대교 왼편으로 나가는 계단을 올랐다. 진짜 최진석교수가 책에 쓴대로, 구석 쟁이 시멘트 틈새로 들꽃들이 친구 따라 피어올라있었다. '아! 이제야 이길을 알다니, 나는 참 무심한 동네사람구나!'. 이토록 낯선 ‘지금 여기’를 느낀 다음에야, 옥수동 원주민이 된 느낌이었다.


친구와 함께나온 '고깔제비꽃'  


 우리는 일상 속 낯섬을 경험하며 두 가지 생각에 골몰했다. 

첫째, 일상속의 생소함을 경험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괜히 시간 낭비하는 하는 거 아닌가? 필자 좋고 다 배부른 소리다. 라는 의심. 물론 합리적으로는 헛짓꺼리일 수 있다. 시간도 더 걸리고, 헤맬 수도 있는 괜한 고생을 한 셈이니까. 하지만, 내면의 나는 도모지 합리적이지가 않은 거 같다. 


 시간에 관한 고전 판타지 동화 소설 < 모모 >를 읽는 사람은 알 것이다. 시간을 합리적으로 능률적으로 쪼개서 쓸수록 우리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 연기처럼 희미해진다는 것을. 물론 치밀하게 계획을 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닌 거 같다. 시간을 아끼려고 쪼개는 게 문제인 거 같다. 그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을 아끼지 못한 사람으로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가?

일단 나는 시간의 짝꿍 동사인 ‘쓰다’가 맘에 들지 않는다. ‘쓰다’라는 동사에는 쓰고 나면 남은 게 없어지는 느낌이 든다. 소모적인 개념 같다.  ‘쓰다’ 대신 시간을 ‘쏟는다, 준다, 투자한다, 쌓는다, 느낀다 ’ 등등 다양한 동사로 바꾸면 금세 풍요로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쌓고 있고, 특히 독서와 공부에 쏟고 있으며, 늘 고맙고 사랑스런 사람들에게 기꺼이 시간을 선사하며, 매일  충분히 잠에게 시간을 투자한다. 그리고 낯섬을 통해 지금이라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그깟 낯섬. 생소함. 느껴서 뭘 해? 라고 내면의 누군가가 또 말하겠지? 그렇다면, 그런 생각을 깨는 것 자체가 낯섬의 역할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언제나 생각하는 존재일 수 없다는 전제를 한 뒤, 뜻밖의 상황속에서 익숙함이 사라져 낯섦이 찾아올 때, 바로 그 순간이 생각하는 인간으로 깨어나는 시작이라고 했다. 즉, ‘낯설게하기’의 가치는 쓸데없는 잡념을 끊어버리는 정신적인 환기, 예민함을 발하며 깨어있는 사람으로의 복원이다. 깨어나서 무엇을 할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단 깨어나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두 번째로 느낀 것은, 왜 하필이면 <인간이 그리는 무늬> 책에서 이 페이지가 가장 좋았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책에는 훌륭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장자, 노자, 공자, 조주선사, 유비와 조조, 스티브잡스 등등...  하지만, 왜 나는 최진석 교수가 대학생 시절, 가장 망가졌던(?), 그 이름도 촌스러운 ‘노고산 여인숙’에서 외박한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오래 남았을까? 이게 나의 공감 수준인가? 장자, 노자 얘기는 이해를 못하니까? (내 안에 항상 나를 디스하는 녀석이 있다). 

 이 의문점으로 다시 책을 뒤적뒤적해보니,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과 나의 질문이 어느 결에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책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분들의 일화와 언사가 인용되면서 저자의 메시지가 설명되고 있었다. 그 중 저자가 경험한 부분은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을 지도한 에피소드가 대부분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favorite page)인 술마시고 외박한 사건만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내가 건진 것은 저자의 고유한 흥미로운 이야기이지, 훌륭하고 좋은 인용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자기로부터 나온 고유한 이야기가 진짜 새로운 장르’라는 것!


저는 여러분들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음 힘이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아름답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습니다. -280P


우리는 책을 볼 때, 표현이 멋진 문장이나 논리적으로 완벽한 문장, 그리고 주제가 적힌 중요 단락에 매료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만 좋아할 거야' 하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저자만의 솔직하고 고유한, 어쩌면 좀 시시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공명하게끔 되어 있다. 우리는 재밌는 오리지널을 좋아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항상 나처럼 별로인 사람도 책을 낼 수 있을까, 더 똑똑해지고, 더 잘 쓸 수 있을 때로 미루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한다. 책을 읽다 모르는 것이 나오면, 이런 것도 이해 못하는데 쩝, 하면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나를 구박하곤 한다. 하지만, 독자들이 가장 공명할 수 있는 대목은 시시할지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쓴 부분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달았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작지만 고유한 낯섬과 생소한 것들에 대해 써도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페이지는 살아남았다. 누구든 고유한 이야기를 쓴다면 그것은 행복하고, 아름답고, 창의적인 저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맨 앞에 소개한 정보사회 강의 시간 얘기로 돌아가 봐도, 그 많은 학자들의 학설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Y교수님이 ‘이건 실화인데’ 하며 해준 그 출처도 알 수 없는 AI 이야기만 기억에 남는다는 거.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들의 생각은 익숙함을 넘고 너머 ‘나’만의 고유성으로 나아갈 것이다. 




-> 덧붙여


 특히 이 책은 또다른 소중한 의미가 있기도 한데, 우리가 2014년 ‘책 잡히는 라디오 <독감>’ 이란 독서 토크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1 회로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 책이 준 에너지는 엄청 났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해야 자신만의 질문이 서며, 그 질문 속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자기 자신이 태동한다는 메시지. 오직 자신의 고유성만으로 세상에 없는 새로움을 만들 수 있다는, 마치 신화처럼!


 살아있는 욕망과 질문하는 힘이 있어야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 갈 수 있다 – 277P


 자신만의 장르는 자기로부터 나온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고, 아름답지도 창의적이지도 않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다’(280P)고 힘주어 강조한다. 우리** 들은 이 책을 읽고 자신만의 컨텐츠를 제작한다는 점에 한껏 들떠 경도되어 으샤으샤할 수 있었고, 그 기운 덕분인지 2020년 지금까지 7년씩이나 <독감***>을 제작해오고 있다. 우리는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우선 우리부터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매회 스페셜 게스트를 초대해서 진행 중이다. 예를 들면 애서가들, 애독자들, 도서관 사서님들, 작가, 출판인 등등 이다. 그동안 정말 다양한 직업, 연령대의 초대 손님이 나왔지만, 모두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책을 무지하게 좋아한다는 거, 둘째, 책독감 라디오에 출연한 후, 모두 다시 출연하고 싶어 한다는 것! 책을 읽고 라디오 게스트로 나와 책 얘기 실컷하기. 이 일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정 매력적인 일이란 걸 알았다.


 우리는 한국인들의 수다 문화에서 개인적인 일상사, 애피소드, 영화, 드라마, 연예인 이야기 등등의 리스트에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책 이야기’ 도 언제나 준비된 단골 토크 주제로 거론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제 들어도 피상적인 대화가 아닌, 책을 중심으로 한 심도 있는 대화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소통을 통해서 함께 생각의 궤적을 가늠하고 나눔으로써 좋은 자극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책 이야기를 통해 문학에 대해서, 인문학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대화를 확장해 나가다보면, 작고 자잘한 수다만을 주로 나누는 사람들과는 다른 연대감이 생기는 거 같다. 대화 주제가 확장됨에 따라 관계도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할까. 그 순간, 우리는 서로 깨어있는 눈빛을 확인할 수 있다. 관심과 공감을 얻기 위해 가볍고 쉬운 수다만 떨 것인가? 책 이야기로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서로 깊어가는 소통하길 원하는가?


*우리 : 자신의 자아가 하나가 아닌 것은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나'로 표현하기 무리가 있는 맥락에서는 '우리'라는 주어로 썼다. 


** 우리 : 여기서의 우리는 '꾸미와 발가락'이다. '꾸미'는 나의 닉네임이고, '발가락'은 나의 소중한 파트너 DJ이다. 


*** 책잡히는 라디오 <독감> : 공동체라디오 마포 FM, 팟빵에서 들을 수 있는 꾸미와 발가락이 진행하는 북 토크쇼 라디오 방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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