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써야하나'를 묻는 당신께
나는 왜 쓰는가? 어지러운 정신을 하나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나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 쓰이기 위해, 내가 쓸 때, 정신은 펜이 되니까, 펜이 되어야 쓸 수 있고, 쓸 때만 펜이 되니까, 이런 관계를 어떻게 표현해야하지? 원인과 결과가 하나인 걸.
쓰기는 나에게 부정의 세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행위인가?
나는 씀으로써 쓰여 지고 일분일초라는 실재를 겪는 단 하나의 정신이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태의 정신은 글을 쓸 때이므로 나는 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동안 쓰지 못했다는 것은 나에게 장애물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질구레한 흔한 핑계들, 주의산만, 급한 업무, 만성피로, 아픈가싶은 게으름, 그냥 코로나 때문에...그 뿐만이 아니다.
가장 큰 주범은 의지박약.
그것은 나의 정신과의 싸움이다. 솔직히... 문제를 들여다보기 싫은 거다. 불편한 것들을 다 덮을 만한 커다란 이불 같은 장막도 없으면서. 그런 밑천도 없으면서. 그래서 계속 거슬리면서 못 본척할 수도 없을 거면서..
나의 정신의 디폴트값은 ‘살기 싫다’이다.
내 정신은. 그렇게 유전되었다. 부모탓이 아니다. 우연한 유전자의 조합탓이다. 자연은 그렇게 의도없이 잔인한 확률이다. 항상 기세등등하고 밥맛좋은 기질들. 부럽다. 하지만 내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밥맛이 없는데 밥을 먹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먹는다. 살기 싫은데 살아지는 거. 버러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와 나를 바라보고는 시선들은 그럴듯한 삶으로 그려지길 원했고, 따라서 보기엔 엄청 밝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의 비관성은 유쾌한 밝은 껍질을 가지게 되어, 외부와 내부의 색깔차이가 급격히 요동칠 때가 찾아온다. 그때, 내게 오직 의미 있는 하나는 일기 따위라도 ‘글’을 쓰고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언제부턴가 그랬고, 요 며칠 동안 심했다.
해야 하는데 안하고 있는 일들은 하루하루 설거지더미처럼 쌓여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고, 옆구리살들은 접히기 시작했고, 방구도 유독 냄새가 진동했다. 그 정신의 총기는 어디 갔을까? 왜 나는 쓰기를 멈추고, 쓰지 못한다고 구박하는가? 왜 자신을 흠씬 패주고 싶은가? 왜 뾰족한 펜이 되었을 때만 내 정신은 건강한가? 나는 평생 쓰기의 노예가 될 운명인가?
운명?! 그건 참 촌스러운 말.
내내 무시하다가, 죽을 때나 돼서 거론하고 싶은 말. 아니면, 졌다고 말하기 싫을 때, 슬프고 확실히 불행할 때, 고개를 드는 나의 막장 얼굴...
비열한 사회에서 비겁한 너희들 때문에 나도 한 비겁해야하나를 고려할 때,
나의 정신은 펜이 되어야 해. ‘노’라고 말하는 괴짜의 전형을 보여주고 싶어.
(내게 있는 무기는 그것밖에 없어.)
사람들이 모이면, 항상 생산성에 대해 말을 한다.
능률성에 대해 평가하고, 성공을 판단한다. 전자제품의 스펙이 적힌 도표처럼 심플한 기준들. 하지만 어려운 건, 그 기준들이 꽤 빨리 바뀐다는 것. 요즘 트렌드. 대세들. 앞서가는 종목들. 자기계발서에서 종종 나오는 붉은 여왕 가설처럼 모든 현대인들은 경쟁이란 러닝머신을 타고 있는 겪이지. 속도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선 빨라야 한다. 낙오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선 적어도 빨리 걷기라도 해야지. 멈추면 안 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러니까 인류가 그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것을 메타적 사고라고 하면, 글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글은 메타적 글쓰기라고 하면, 정말이지 메타적인 끄적임이라서 힘든 거 같다. 이런 부류들은 쓰고 나서 평가하고 그 과정에서 지친다.
장미를 쓰고도 장미가 되지 못하고, 가시에 찔리는 아픈 손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글이 팔리느냐 아니냐는 두 번째다.
발자크가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썼고 큰돈을 갚았다면, 나는 살기 위해, 살고 싶기 위해 써야한다. 심장 보조장치를 단 환자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듯이. 아. 이런 비유는 그분들에게 미안한 것이지만, 내 마음이 이렇다.
다행히 글감은 널려있다고 생각한다.
하찮은 것이더라도 그릴 수 있듯이, 내가 먹고 남긴 음식 쓰레기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환상과 가정, 약간의 그로데스크한 허풍과 거짓말의 설탕도 쓸 수 있으니까. 쓰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 펜이 되는 뾰족해진 정신이 있다면.
정말 쪽팔리지만 나는 인류의 대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쓰고 있는 사람, 고작 한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쓸지도 모른다. 순간이란 과녁 안에 살아있는 정신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곳에 오래도록 깨어 있다보면,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들이 멋들어지게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잘 살아있다면, 나라는 펜은 닳지는 않을 것이다.
부서질지언정 (이건 무슨 록커의 다짐 같은데?)
그래도 이왕이면 헛소리하는 노인으로 늙고 싶지 않다. 가끔 엑스텐을 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엑스텐. (그것도 내가 만든 허공이겠지만)
아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얼마나 많고 막막한지.
그 막막함에 주눅 들곤 하지. 그래서 침묵하면 안 되는데. 어릴 땐, 마구 막춤이라도 췄었는데.
어린 마음. 그것이 삶의 리셋버튼, 시작의 열쇠라고 느낄 때가 많다.
그만큼 거기서 멀어져서 어린 마음, 순수의 본체가 보인다는 뜻일까?
그 당시 흔들어댔던 막춤의 자연스러움.
잉크가 벽에 튀듯이. 잭슨 폴록처럼. 현실을 초월해서, 그래. 결국 순수로의 귀환.
쓰는 정신의 줄을 부여잡고 하루를, 순간을 살아가야한다.
겨우. 겨우 라도, 줄곧... 그렇게 살자.
(결국, 그렇게 ‘살자’란 다짐을 위해 또 그렇게 가시들에 찔렸구나.
세상 눈치보지 말고, 자책은 금지. 내 몸에 피가 흐르는 한 잉크는 충분하다. 굳이 장꼭도의 시 제목*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들의 끓는 피는 다양하고 훌륭한 작품들로 피어나고 있다.
결국 ‘나만 잘하면 된다’는 진리를, '스스로 돕는 용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토록 진부한 다짐을 또다른 언어들로 쓰고 있다.
거역하지 못하는 ‘쓰기의 절대적 의미’에 대해. )
나는 왜 써야만 하는가? 란 물음에는 이미 대답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써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 그 말을 당당하게 못했는가? ....
#출사표
*장꼭도 (Jean Cocteau)의 <나의 피는 잉크가 되었소> : ‘ 난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오. ’ 라고 끝나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