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9 MMCA 자문단으로 목소리를 담아내다.
솔직히 말하자면 국내의 '국립미술관'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나만의 편견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국립'이란 용어가 붙으면 뭔가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느낌을 먼저 받을 뿐이지, 어떤 요소에서도 사람의 이목을 끄는 'Sexy'함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10대 때 매번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마다 방학과제로 ‘방학 탐구생활’ 책에 나오는 각종 다양한 미션을 클리어하고자 엄마 손을 잡고 과천 국립미술관도 자주 찾았고, 인체신비 모형 전이나 세계 나비 변천사 등을
실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국립과학박물관을 자주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매번 방학 때 다른 친구들은 새 학기 공부를 미리 예습한다거나 뒤쳐졌던 지난 학기들을 복습하기 위해 학원을 다녔지만 우리 집은 조금 달랐다.
방학 때면 아빠는 학기 때 보다 더 이른 시간에 나와 남동생을 깨워 동네 학교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 운동을 시켰고, 엄마는 나와 남동생을 국립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박물관, 독립기념관, 국립과학박물관에 자주 데리고 가셨다. 친구들은 유행 가요를 따라 부를 때 나는 늦게까지 동요를 배우고 익히게 하셨고 동화와 동시를 충분히 읽게끔 지도해주셨다. 금방 깨져버릴 수 있는 어린이의 동심을 오랫동안 갖고 감수성을 키워갈 수 있게 도와주신 것 같다. 학교 공부를 (만족스럽게 따라갔던 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겨울 방학 동안에 학업 보충하는 걸 우선으로 채워주지 않고 오히려 음악/미술/체육과 같은 감수성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무엇이든 오감으로 직접 경험하도록 도와주신 게 얼마나 값진 '부모의 가이드'였는지, 다 크고 나서야 감사함을 느낀다. 어차피 성인이 된 후 일 하면서도 공부라는 건 일평생 해야 하는 거지만 '감성'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너무 딱딱하게 굳어져버려 발달시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는 미술관도 박물관이 마냥 재밌지만은 않았다. 이촌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내가 갖고 있던 각종 ‘국립’ 미술관과 박물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학교 과제’와 연결이 되어서인지 지루하고 고리타분하다는 편견도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성인이 된 후 매번 미술관을 찾게 될 때도 다소 무거운 느낌의 국립미술관 대신에 편한 마음으로 가볍게 들러보기 좋은 사립미술관 (환기미술관이나 대림미술관, 한남동 디뮤지엄 등)이나 작은 갤러리에 들르곤 했었다.
지난해 2018년 9월,
2주간의 미국 출장으로 워싱턴 D.C. 와 필라델피아를 다녀오면서 2주간의 개인 휴가를 덧이어 재즈와 문화의 도시 뉴올리언스와 시카고를 다녀왔다. 네 개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꼭 들러본 곳이 있다. 바로 각 지역의 대표 미술관 방문이었고 각 미술관에서 전시 관람을 하며 온종일 시간을 할애했다. 전시뿐 아니라 세미나 교육장소와 아이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비롯해 카페테리아의 식사와 커피까지 맛보고 마지막은 기프트샵에서 판매하는 선물까지 살피는 것으로 각 도시의 미술관 여행을 마무리짓곤 했다. 도시 구석구석의 작은 갤러리들도 보고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짧은 일정 동안 대표적인 국립미술관을 찾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침 일찍 입장해 퇴장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나올 때까지 미술관 밖을 나오지 않았다. 특히나 2주 이상 머물렀던 워싱턴 D.C. 에서는 수십 군데 무료입장이 가능한 뮤지엄들 중 National Gallery of Art (워싱턴 국립미술관)은 네 번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 살피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나와야 했다. 워낙 방대한 규모여서 두 개의 미술동을 다 둘러볼 수도 없었을뿐더러, 주말마다 진행됐던 미술관 앞마당의 재즈 공연/클래식 공연의 콜라보레이션도 일정이 안 맞아 대다수 놓쳤다.
한번 다녀온 전시에 깊은 여운이 남아 계속 생각할 거리를 떠올리게 된다거나, 한번 더 전시회로 발걸
음을 찾게 된다거나, 혹은 다음 전시를 기다리게 해주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한국사회같이
일상이 바쁜 현대인들이 미술관을 얼마나 자주 찾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반대로 ‘짧고 금세 잊히는’ 시간들 속에 무언가 밀도 있고 오랜 잔상이 남는 것들을 찾고 싶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에서의 다양한 미술관 여행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와서 아주 오랜만에 국내 국립미술관을 다시 찾았다. 그전에 찾아다녔던 사립 미술관이나 작은 갤러리들 외에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의 네 개관 (덕수궁, 삼청동 서울관, 과천관, 새로 개관한 수장고 형식의 청주관)은 미국 국립미술관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참에 2019년도 고객자문단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고, 평범한 대한민국의 30대 여성 고객으로서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어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2월 1일 자문단 선정되었다는 '설레는' 연락을 받았고 오리엔테이션도 마쳤다. 선발된 63인의 자문단 분들 각자의 소개를 들어보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대학 신입생부터 정년퇴직 후 머리가 희끗하신 멋진 노신사까지, 각계각층 다양한 분야의 업무 종사자들이 모였다. 12월까지 일정이 빡빡하다. 개인 보고서와 팀별 토론/ 보고서, 정기모임도 거의 매달 운영된다. 퇴근하고 별 일이 없다면 나는 미술관 네 개관 중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을 예정이다. 참말로 행복할 노릇이다. 후훗..
편견 하나가 깨졌다.
객관적이고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를 듣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런 대규모의 자문단을 꾸려 매년 체계적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실제로 그동안 고객자문단의 목소리를 즉각적으로 반영해 시설/전시/교육/정보 등 각 분야의 변화를 보여왔단다. 평소 관심 갖고 좋아하던 일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녹여낼 수 있으니 신선한 도전이다. 자문을 하기 보다는 내가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