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만들기 워크숍
캐릭터 만들기란 대체 무엇일까. 늘 궁금했다. 연기가 '나'라는 인간을 재료로 사용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과연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종종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를 반복하는 거 아니야? 정말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실 연기의 시작은 나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사람이 되어보고자였는데 갈수록 결국 나를 반복하고 강화한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해하는 세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내가 이해하고 싶은 세계.
내가 있는 곳, 내가 있을 수 있는 곳, 내가 있고 싶은 곳.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것들을 '정말로'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어떤 작품을 하고 싶고,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은 마음도 결국 '나'를 건드리는 접점이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까지는 모성애가 강한 어머니를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는 그런 인물을 잘 그려내지도 못할 것이다. 연기는 흉내를 잘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나에게 흥미진진해야만 마음에 파동이 일어 그 인물을 잘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연기에는 '나'의 외모, 표정, 목소리, 발음, 피지컬, 습관, 걸음걸이들이 다 드러난다. (그래서 배우는 중립 상태를 위한 훈련을 해야 하는 것!) 나는 말할 때 눈썹을 많이 움직이는데 영상으로 보면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거슬린다. 또 화를 낼 때는 비아냥 거리는 편이라 그런지 연기로 보면 말을 질질 끌어서 거슬리고 정당하게 화를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쨌든 마음과 몸을 모두 바꿔야 나로부타 벗어나 캐릭터가 될 것인데! 그래서 늘 궁금했던 캐릭터 만드는 법! 캐릭터 만들기 워크숍에서 드디어 배우게 되었다.
첫 수업 때에 독백 연기는 캐릭터를 만드는 방식을 알아보는 과정이라, 정말 아무거나 선택하셔도 됩니다. 혹시 몇마디 호흡 맞춰야 할 상대가 필요하면 요청하셔도 좋구요. 독백과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모두 포함해서 10분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그래서 독백은 2-3분 분량이면 좋을듯 합니다
첫 수업을 위한 준비물은 자유 독백 연기이다.
오디션을 위한 독백이 아니다보니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걸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뭘 해볼까? 최대한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렇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여러 후보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니 그리 많지 않았다. 여자 배역 스테레오 타입으로 따지자면 나는 니나와 마샤 중에 마샤에 속하는 편이니 니나같은 친구를 해볼까 했는데 (잘 어울리는 것과 별개로) 하면 또 할 수 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걸 찾아볼까?
그래서 나는 부당거래 '주양' 검사(류승범 배우 역)를 해보기로 했다. 선생님으로부터 2차 안내가 왔다.
이번주 일요일에 독백 연기를 하되!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에 대해 깊이 생각해오면 좋겠다 하셔요. 즉, 해당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연구를 했는지 그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 주된 목적이라 합니다.
어떻게 캐릭터를 연구하는지는 잘 몰라서ㅠ 다음과 같이 걍 써내려갔다.
주양: (기자와 전화통화) 아이, 무슨 사람이 무슨 죄가 있어야 잡아넣지. 아이~ 그래도 내가 요번에 그 태경 김회장 조사를 좀 하다보니까 그 광수대 그 최철기 그 양반이 오바를 무지하게 했드만. 그 양반 원래 캐릭터가 그런가? 아, 그리고 그 그날 오실거지? 어. 우리 만나서 자세한 얘기합시다. 예. (수사관에게) 그 광수대 그 최철기 그 양반 그 보충자료 좀 넘어 왔어요?
수사관: 아 예. 그 아...최철기 반장 그 관련 그 자료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조사를 하다보니까 말입니다. 경찰 쪽에서 이 최철기 내사를 지금 막 시작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주양: 내사는 왜요? 그것 좀 알아봐줘요.
수사관: 근데 이 내사에 관련해서는 경찰 쪽에서 그러니까 좀 싫어하는, 불쾌해하는 심리가 좀 있어요.
주양: 아이, 불쾌해 할 게 뭐 있어요
수사관: 그래도 관계라는 게 또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양: 경찰이 불쾌해한다?
수사관: 그래요
주양: 경찰이 불쾌해하면 안되지. 아, 내가 잘못했네. 아, 내가 큰 실수를 할 뻔 했어요.아, 우리, 우리 공 수사관 증말 대단하시네. 아, 이 내가 대한민국 일개 검사가 증말 경찰을 아주 불쾌하게 할 뻔 했어 내가.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 했구만. 내가 잘못했어, 내가. 거 경찰들 불쾌할 수 있으니까 일들 하지마! 이씨. 경찰들 불쾌한 일들 하지마. 경찰한테 허락받고 일해! 이씨! 내 얘기 똑바로 들어!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상대방 기분 맞춰주다 보면 우리가 일을 못한다고. 알았어요?
- 직업: 서울 중앙지검 검사. 장인어른 빽으로 좋은 사건을 배정받아 잘 나감.
- 스폰 검사이기도 함.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바로 유추해보기로는 좋은 집 데릴 사위로 간 상황이지 않을까. 별도 스폰 받는 것도 그렇고, 장인어른에게 쩔쩔 매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그 좋은 집에서 왜 데려갔을까는 잘 모르겠음. 공부를 엄청나게 잘했나? 부장 검사한테 하는 걸로 봐서는 아양도 잘 떨고 강약약강 스타일이라 정치를 잘 할 것 같음)
- 내가 인간적으로 정말 싫어하는, 재수없어하는 캐릭터인데 또 재밌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음. 싫은 점은 너무 권력지향적이고 정치질하고 강약약강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재밌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그런데 유머가 있음. 비꼬는 게 대단함.
- 참고할 레퍼런스? 내가 본 변호사, 노무사 등. (의사, 회계사들보다 훨씬 더 연극적인 측면이 있음. 말로 좀 압도하고 이래야 해서 그런 것 같음. 그들의 그 연극적인 제스처와 꼿꼿한 몸짓. 싸우고자 하는 의지 이런 것들) 킹차갓무직 다닌다고 생각하는 대기업러. 금융공사나 IB 다니는 이들. 김앤장이나 한국은행급 다니면 진짜 돌아버린 경우 보긴 함. 자기 직업 얘기할 때의 그 엄청나고 은근한 자부심이 표정에 드러남. (그런데 또 내 주변은 소탈한(?) 편이라 오히려 자기가 생각했던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거에 대한 당황함과 허망함을 느끼는 걸 주로 봄) 또 결은 다르지만 창업자들. (그런데 스타트업 사람들은 또 본인들은 '속물적인' 그들과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실제로 욕망이 다르기도 함- 결은 다르긴 함) 공통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민의식과 확고함이 있음. 본인이 노력해서 정당하게 얻었다고 생각함. 남들 얘기 잘 안들음.
- 자기가 생각하기에 남들은 다 멍청하고 답답한데 그게 도를 넘어서면 나오는 경멸스러운 표정. 당해보기도 했고, 목격도 많이 함. 진짜 의기양양해하고 가르치고 싶어하는 태도. 그 표정, 자세, 태도!!!
- 대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일개 검사'. 경찰한테 무시받았다는 생각에 극도로 흥분하는 점으로 봐서 정말 직업과 회사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사람. 직업으로 다른 사람들 깔아뭉개는 사람들은 블라인드 봐도 차고 넘치는데....볼 때마다, 설령 저렇게 생각한다 해도 그렇게 자동반사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뭘까 궁금했음. 그 지반에는 불안함과 열등감이 있어서일까? 그러니까 서울대생은 가만히 있는데 연고대생들이, 그 다음 서성한생들이 서로 싸우니까. 그 밑으로 가면 더 구구절절해짐....뭔가 자기보다 더 높은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발끈하는 건가? 직업이나 회사로 사람들 무시하는 것 또한 자기 지반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서 기인하나? 그리고 지금 내 위치와 보상은 순전히 나의 노력과 성과인데 이걸 모두가 인정해주고 리스펙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음. (이건 좀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중소기업 다니거나 이러는 걸 진짜 경멸하다시피 표현함)
- 그럼 나와 만나는 지점: 나 역시 이 위계 질서(학벌, 재력, 외모 등등) 를 순응하고 의식함. 내가 상위가 아니라서일 뿐이지 내가 인정하거나 납득할 수 없으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함.
- 내가 이렇게 주양처럼 발끈했던 적은? 사실 이제 에너지도 없어서 발끈도 못함. 그런데 생각해보니 가장 최근은 그나마 내가 책을 출간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이거에 대해서 폄하했고 그때 흥분했음.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성과를 누군가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또 자기는 그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정말 기분 나빴고 흥분했던 것 같음. 그때 나는 "어차피 아무한테나 가는 기회가 아니기 때문에 너는 못 할 거라는" 식으로 상대를 깔아뭉갰음. 그 외로는 30대 여자인데 왜 시집도 못갔냐고 이제 팔리지도 않는 아줌마라는 말, 자기자랑하는 남자들 보면 아직 흥분하긴 하네.
- 그때의 나는? 어이없어하고 상대를 경멸하고 비꼼. 어이없어하는 게 포인트네. 예를 들어 '경찰이 흥분해한다?'라는 대사는 나에게 '니가 쓴 책은 줘도 안읽는다' 혹은 '아줌마'인 거 같고, 후자가 더 감각적으로 훅 들어옴. 그렇지만 나는 비꼬는 걸로 끝난다면 주양은 엄청나게 화를 낸다는 차이가 있음. 본인이 상사이고 더 위에 확실히 있다고 생각해서 더 확고하게 화를 내는 것 같음.
- 생각해보니... 내가 한창 애들 가르칠 때...주양 검사같았을 거 같음...진짜 지랄했음..
- 외관: 깔끔한 외관과 의기양양한 태도 / 마음: 아직 모르겄음! 무엇이 나를 어이없게 하나? 마음 속 깊은 열등감?
결론
하고 싶은 이유: 나와는 먼 '권력'을 가진 사람을 연기해보고 싶어서
캐릭터 만드는 법: 유사한 내 경험 가지고 오기, 유사한 사람 관찰했던 것 가지고 오기, 그 사람의 외관과 내면 상상하고 다듬기
성취해야 하는 것: 정말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화를 내야 함. 에너지와 분노가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