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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Mar 15. 2024

깊고 너그럽게

살아있는 연기를 위한 링클레이터 수업 1일 차

살아있는 연기를 위한 링클레이터 워크숍을 듣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런 류의 수업에 조금 편견이 있다. 워낙 몸을 잘 못 쓰기도 하고, 감각에 민감한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의식도 발달해서 어떨 때는 좀 괴롭기까지 하다. 차라리 어떤 동작을 알려주면 최대한 따라 해보겠는데 자유롭게 움직이고 소리내보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떻게? 어떻게 해? 이러고 있다. 또 뭔가 엄청나게 호기심 넘치고 흥미로워해야만 할 거 같은데 내가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그런 부담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업에 등록을 했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안고 연습실에 들어섰다. 자유로운 호흡과 발성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함께 할 것인지부터 이야기 나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나의 목소리를 내 충동을 가지고 내는 게 중요하다, 내 몸과 소리에 각인된 트라우마가 우리를 변형시켰기 때문에 그것들을 흘려보내는 작업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다 선생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하신 얘기가 나를 잡아챘다. 대략 이런 얘기였던 것 같다. 일상에 맞는 호흡과 발성이 있고 무대 위에서의 호흡과 발성이 있는데 배우들이라고 언제나 릴랙스 되어 있고 언제나 자유롭게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일단 사람들도 이상하게 본다고. 그래서 어떨 때는 무대 위가 오히려 편하다고. 어떤 캐릭터로 있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상은 훨씬 복잡한 맥락들이 있다고. 그런데 배우는 일상과 무대를 자유자재로 스위치 온/오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우로서의 몸과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 편인 나는 저런 본투비 배우들을 동경한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자유롭지? 어떻게 저렇게 릴랙스 되어 있지? 동시에 그런 사람들을 좀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이란 걸 경험해보지 않아서 저런가 보다 하면서.


나는 질문했다. 일상과 무대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상에서도 사실 어려움을 겪는다고. 그런데 이 스위치 바꾸는 게 가능하냐고. 선생님은 답하셨다. 일단 쉽지 않다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부터 재고해 보자고. 이거 이거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볼까나? 이러면서 흥미롭게 접근해 보자는 말로 움직임 수업이 시작됐다. 


우리는 걷는다. 뛰기도 한다. 멈추기도 하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한다. 선생님의 디렉션에 따라 계속계속. 선생님은 일부러 흥미진진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자신의 디렉션을 기다리지 말라고도 했다. 우리는 몸을 넓혀도 보고 좁혀도 보고 사람들을 의식도 해보고 만나보고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라는 지시에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저가 커피 브랜드 커피가 보였고, 화분이 보였고, 창 밖이 보였고, 등이 보였고, 벽이 보였다. 선생님은 이번에는 '배우의 눈'으로 보라고 했다. '배우'는 다른 걸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배우의 눈은 깊고 넓다. 너그럽고 부드럽다.


신기했다. 깊고 너그럽게, 넓고 부드럽게. 말 한마디만으로 나는 다른 것들을 즉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화분 중에서도 아주 작은 화분이 보였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 커튼의 움직임, 창 밖에는 오래된 밥집 앞에 놓인 입간판. 그 위에 붙은 종이 위 매직으로 쓴듯한 투박한 메뉴판. 귀여움, 생명, 몽글몽글함, 왠지 모를 슬픔, 누군가의 고된 노동, 지침, 티비 소리 같은 것들이 보이고 들렸다. 나는 일부러 흥미진진하게 그것들을 바라보는 척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디렉션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그냥 흘러갔다.


연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언가가 '됐다!'라고 생각되는 순간 무조건 망한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작업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됐어! 이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하면서 그 상태를 유지하는 순간 살아있지 않게 된다. 연기의 본질은 살아있음인데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흘러가는 게 무척이나 중요하다. 

 

선생님은 디렉션은 가능성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보라'라는 게 가능성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의 초대로 들렸다. 그 안에서 배우는 그 배우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낸다. 나는 나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어! 그게 바로 배우만이 창조할 수 있는 영역이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나도 내 연기가 너무나 예측되기 시작했다. 이런 대사는 그냥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연기'가 아니라는 피드백을 받은 적도 있다. 디렉션이 가능성이라는 말을 믿고, 자유롭게 탐험해 볼 테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실패를 감행해보려고 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때그때마다의 시도가 있을 뿐이다. 그저 탐험해 볼 뿐이다. 


참, 내가 이 수업을 듣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비단 연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생생하게 살아있고 싶어서이다. 살아있다는 걸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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