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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14. 2024

처음 가는 바에선 올드패션드를

낯선 바에서 익숙한 칵테일을 시키는 이유

처음 가는 바에서 나는 익숙한 칵테일을 주문한다. 어디서나 마실 수 있고 내가 그 맛을 확실히 알고 있는 칵테일 말이다. 바텐더의 실력을 평가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나는 미각이 둔해 그런 평가를 할 재주가 없다. 바텐더의 스타일을 모르니, 생소한 칵테일을 시켜 입맛에 맞지 않는 술을 앞에 두고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다.


“여기 이런 바가 다 있었네요?”


그 앞을 백여 번은 지나갔을 텐데, 바가 있는 줄 몰랐다. 얼마 전에 인테리어를 해서 개방감을 주었다는 바텐더의 설명이었다. 덕분에 내가 이 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이젠 바가 이렇게 밖에서도 잘 보이고 환해야지. 나는 항상 바는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피크이지처럼 숨겨둔 바가 아니라 훤히 드러나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바 말이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팩토리정도 1층으로 옮기면서 통창으로 바깥이 보이게 되었고 환해졌다. (아, 지금은 팩토리정을 얘기하는 게 아닌데.)


첫 잔은 올드패션드다. “클래식하게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클래식하다는 인상을 풍기며 바텐더는 잔에 각설탕을 넣고 비터스를 떨어뜨렸다. 그렇지, 클래식은 설탕이지, 하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와일드 터키 8이 메인이었고 꼭지체리를 얹어 잔을 내왔다. 나는 겉으로도 웃고 말았다. 꼭지체리라니. 이거 완전 클래식하잖아!

올드패션드는 맛없는 위스키를 맛있게 마시기 위해 설탕과 물, 비터 등을 섞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초에 등장했다고 하는데, 여러 변화를 거쳐 정작 꽃을 피운 건 1920년대 이후 금주법 시대였다(하긴, 금주법 시대에 빛난 칵테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초창기에는 칵테일에 얹는 가니시가 별로 없었지만, 점차 오렌지와 마라스키노 체리를 얹는 것이 일종의 기본 레시피가 되었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 조주기능사 시험에는 오렌지와 빨간 체리(꼭지는 없었다)를 같이 얹는 레시피였던 것 같다. 요즘은 꼭지체리보다는 직접 술에 담가 숙성시킨 체리를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 검보라색이 도는 큼지막하고 맛있는 체리들이다. 병조림으로 나오는 마라스키노 체리도 한동안 인기였는데, 그건 요즘 잘 보이지 않더라. 그렇게 엄숙한 체리가 올라온 올드패션드에 익숙해져 있는데, 난데없이 빨간 꼭지체리가 귀엽게 얹힌 걸 보니 내가 웃고 말았던 것이다.


내 올드패션드 첫 잔은 어디서 마셨을까? 기억은 안 나지만, 가니시가 레몬 슬라이스와 체리였던 건 틀림없다. 그래서 이 곳이 처음이었지만 괜히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아, 맞다. 이래서 내가 낯선 바에서 익숙한 술을 시키는 거였다. 불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바에서 손에 쥔 칵테일 잔은 묵직했고, 유리 표면을 타고 흐르는 냉기는 ‘여기는 네가 좋아하는 바야’라고 속삭였다.


칵테일은 마음에 들었고, 1년 8개월의 금주를 끝내고 이제 막 다시 마시기 시작한 터라 두 잔만 마실 생각이었는데 결국 세 잔을 마시고 말았다. 나는 78%쯤 취했고 약간 흥분되는 걸 느꼈다. 여기서 멈춰야지. 아주 편안한 가격에 아주 편안한 마음이 되어 가게를 나섰다. 이래서 내가 바를 좋아하는 거지.


여기는 연남동 바람커피 앞에 있는 바 33유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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