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AI 곡예: 미·중 줄타기 속 제3의 길

한국 AI는 스위스 모델 전략을 펼쳐야 한다

by 레이

“우리 편이냐, 아니냐”라는 질문 앞에서


지난 8월, 인천의 한 회의장에서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과 마이클 크라치오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이 마주 앉았다. 자리에는 기자들의 셔터 소리 대신,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곧 열릴 이재명, 트럼프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이 AI 기술 협력의 청사진을 그리는 순간이었다. 그 중심에는 ‘한·미 AI 스택 협력’이라는 새로운 키워드가 있었다. 반도체부터 네트워크 에너지 인프라까지, 말 그대로 AI 전방위 로드맵이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밀착이 과연 정답일까? 아니면 지금이야말로 제3의 길을 열어야 할 때일까?


삼성, 두 바다를 오가는 거상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 공정을 128단에서 236단으로 올리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는 1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다. 그러나 중국 메모리 사업은 접지 않았다. 단순한 탈중국이 아니라, ‘포트폴리오 다각화’라는 이름의 줄타기다. 미·중 어느 쪽이 파도가 거세져도 배를 한쪽에만 묶지 않는 방식이다.


네이버, 언어로 쌓는 요새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X로 독자 AI 모델을 키우면서도 일본 소프트뱅크와의 관계를 놓지 않는다. 영어 중심의 글로벌 AI 전쟁터에서 굳이 싸우지 않고,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좁지만 깊은 시장을 판다. 이것은 단순한 로컬 전략이 아니다.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고, 대체 불가능한 ‘언어 요새’를 세우는 일이다. 다만 일본 시장에서의 파트너십 변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SK하이닉스, 양손에 다른 무기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AI 칩에 들어가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60%대 점유율을 차지한다. 미국 AI 붐의 핵심 동력인 동시에 중국에서는 일반 메모리 사업을 계속한다. 첨단 기술은 미국, 범용 제품은 중국. 제재를 피하면서 양쪽 시장 모두에서 이익을 취하는 고도의 균형감각이다.


SK텔레콤, ‘한국형 풀스택’의 실험


통신사였던 SK텔레콤은 이제 AI 플랫폼 기업을 꿈꾼다. 1천만 명이 쓰는 AI 에이전트 에이닷(A.), 정보 탐색 서비스 라이너, 그리고 AI 반도체부터 모빌리티까지 아우르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에 선정됐다. SK텔레콤은 구글·MS처럼 전 세계를 장악하겠다는 게 아니라 한국을 중심으로 한 ‘풀스택 허브’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AI 스위스 모델, 가능할까?


정부의 ‘소버린 AI’ 전략은 독자 모델을 키우면서도, 미국과의 협력을 놓지 않는다. 스위스가 금융에서 중립성을 무기로 삼았듯 한국은 AI 인프라 허브, 기술 중개자, 혁신 플랫폼을 동시에 꿈꾼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이 줄타기를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다.


미·중은 점점 더 “우리 편이냐”를 묻고 있다. 그 압박 속에서 한국은 곡예사처럼 외줄 위를 걷는다. 발을 헛디디면 추락이지만 끝까지 버틴다면 AI 시대의 새로운 롤모델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 보기: 한국의 AI 헤징 전략: 미중 사이에서 제3의 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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