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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Apr 12. 2017

15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 2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행복이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지만 불행하기를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자해를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있다. 대개 충동 상태에서 벌이는 행동이거나 더 큰 불행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건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평상적인 상황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 선뜻 답하기 쉽지 않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대중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동일한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령 즐거움이나 부나 명예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이 사정에 따라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병들었을 때는 건강을, 가난할 때는 부를 행복이라고 하니까.(「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4장)     


행복이 무엇인지 자명하지는 않다. 삶에서 가장 좋은 것,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될 만한 것이 ‘행복’이라면, 먼저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행복이 주관적인 ‘느낌’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어떤 좋은 느낌을 가진 상태’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에 대한 대답은 때에 따라 달라진다. 햇살이 환하고 바람이 살랑거리는 날은 행복하다. 컴퓨터가 고장 나서 모아놓은 자료가 다 날아가면 불행하다. 월급을 받아서 갖고 싶었던 구두를 사면 행복하다. 행복이 이런 느낌에 달렸다면 유동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은 주관적인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인 상태에 달렸다. 그는 행복을 “잘 사는 것”(eu zēn)과 같다고 여긴다. 이것은 “잘 행하는 것”(eu prattein)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삶의 방식을 갖고 있는가? 어떤 스타일의 삶을 지향하는가? 행복은 여기에 달려 있다.     


삶의 유형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행복한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사람들이 가진 삶의 방식들을 몇 가지로 분류한다.  

    

1) 돈을 잘 버는 삶     


행복한 삶의 후보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돈을 잘 버는 삶이다. 수업 중에 “여러분은 언제 행복한가요?”라고 물어보면 “돈을 잘 버는 게 행복인 것 같아요. 너무 돈, 돈 하는 것 같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꼭 필요하잖아요?”라는 대답을 꼭 듣는다.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수업에서 ‘행복’을 논하는 것도 행복하지만, 통장에 강사료가 들어오면 더 행복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돈을 버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5장)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형의 사회라도 돈이 필요할 것이다. 돈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면 돈 버는 일은 우리가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따라서 강제된 일이다. 그러니 돈을 버는 것은 우리의 궁극 목적이 될 수 없다.      


또 부가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돈은 다른 것을 위해서 유용할 따름이니까.(「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5장)      


종종 우리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그것이 ‘목적이다’라는 말과 혼동한다. 병원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병원에 가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 밥을 먹는 것은 꼭 필요하지만 밥 먹으려고 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돈이 나에게 꼭 필요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      


2) 향락적인 삶     


돈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는 어떤 목적을 추구할까?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만한 삶이 뭘까? 향락적인 삶, 곧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는 삶이 떠오른다.    

  

삶을 통해 판단해 보건대, 다중들, 특히 대단히 통속적인 사람들은 좋음과 행복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생각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향락적인 삶을 좋아하는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5장)     


많은 이들이 즐거움을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 즐거움 자체로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즐거움이야말로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은 짐승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완전히 노예와 다름없음을 보여 주지만, 그래도 이유가 없지는 않다. 높은 지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르다나팔로스가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5장)     


‘성공한 사람’, ‘잘 사는 사람’일수록 더 큰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앗시리아의 제왕 사르다나팔로스는 호화롭고 사치스런 삶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이 가장 좋다는 통념도 이해할 만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향락을 좇는 삶이 ‘노예와 다름없는’ 삶이라고 일축한다. 향락은 외부의 자극으로 일어나고 충족된다. 자극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래서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을 충족시키기 위해 산다. 자기에게 좋은 것을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자극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3) 명예로운 삶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향락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고귀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호메로스 이래 희랍인들에게 고귀한 삶이란 명예를 추구하는 삶이었다. 아킬레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와 권력을 누리며 장수하는 삶’과 ‘전쟁터에서 죽는 대신 불멸의 명성을 얻는 삶’ 중에 후자를 택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명예가 있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예로운 삶이 행복한 삶으로서 족하다고 보지 않았다.     


명예는 우리가 추구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인 것 같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사람보다 수여하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좋음은 고유한 어떤 것으로 쉽게 우리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5장)     


아킬레우스는 뛰어난 전사로 큰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하고 진영에서 이탈한다. 명예는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명예를 추구하는 삶은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명예로운 삶이 행복한 삶이라면, 행복은 결국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타인의 인정은 그때그때 변하기 마련이다. 타인의 평가에 좌우되는 행복은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추구하기 어려워 보인다.         


일하는 행복


돈을 잘 버는 삶, 향락을 즐기거나 명예를 누리는 삶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돈은 나의 외부에 있고, 향락을 주는 것들도 대개 내 외부에 있다. 명예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운 좋게 내 곁에 있기도 하지만 나와 언제나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좋은 것인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며 “쉽게 우리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고유한 것”은 우리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다.     


행복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주장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겠지만, 보다 분명하게 행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의 일이 무엇인지 파악된다면, 아마 이것이 이루어질 것 같다. 피리 연주자와 조각가, 그리고 모든 기술자에 대해서, 또 일반적으로 어떤 일과 해야 할 행위가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것의 좋음과 ‘잘함’은 그 일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처럼 인간의 경우에도 인간의 일이 있는 한, 좋음과 ‘잘함’은 인간의 일 안에 있을 것 같아 보인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어떤 일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단지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잘 살고 있는지는 그가 자기 일을 잘 해내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어떤 영화배우가 돈도 잘 벌고, 그 돈으로 향락을 즐기고, 명예와 인기도 넘치게 누리고 있다고 해보자. 그가 자기의 고유한 일인 연기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를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한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라고 자문하는 한 대학교수가 있다면, 그의 행복은 봉급이 얼마냐, 자신의 평판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지 않다. 행복은 그가 연구와 교육이라는 자신의 일을 잘 해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에게서 행복이 (에르곤, ergon)에 달렸다는 생각을 이어받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자기 직무에 뛰어난 사람을 ‘가장 뛰어난 이’(aristos)로 보았던 호메로스의 전통까지 가닿는다. 나의 일은 내가 지니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일이란 내 존재의 실현이다. 행복이란 나에게 ‘어떤 좋은 것들’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좋은 상태로 만드는 데 달려 있다.

우리는 배우로, 교사로, 소방관으로, 직원으로 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으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일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식물이나 동물 등의 다른 생명체와 비교하면서 그것의 고유한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게 되는 것은 이성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식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최소한의 생명 활동인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일을 한다. 동물은 식물처럼 생장을 하면서 동시에 운동을 하고 감각 활동을 한다. 인간은 식물처럼 생장 활동을 하고 동물처럼 감각 활동을 하며, 이성적 사유도 한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일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 자체에 만족하는 사람은 인간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식물과 다름없다. 즐거움을 느끼는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동물과 다름없다. 그러하기에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플라톤도 주장했다시피, 인간에게 고유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잘 하는 상태, 즉 탁월함(아레테, aretē)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타라 연주자와 훌륭한 기타라 연주자의 경우 종류상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다른 모든 경우에도 단적으로 그러하듯이 탁월성에 따른 우월성이 기능에 부가될 것이다. ……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일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7장)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 즉 영혼이 일을 잘 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그저 노는 것도 아니고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능동적인 활동에 있다. 자기 존재의 고유한 일을 탁월하게 수행해낼 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행복의 성취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속적으로 좋다고 불리는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것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눈다. 


좋음들은 통상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왔다. 즉 외적인 좋음이라고 이야기되는 것, 영혼에 관계된 좋음, 육체와 관련된 좋음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그 세 유형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8장)   

  

영혼에 관계된 ‘좋음’은 영혼의 고유한 능력들이 제 일을 잘 해내는 상태를 말한다. 육체적 좋음은 육체의 능력들이 잘 기능하는 상태를 말한다. 외적인 좋음이란 소유물이나 사회적 지위, 처한 환경 등의 외적 조건들이 좋은 상태를 뜻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들이다. 

물론 우선순위를 논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계된 좋음이 가장 진정하고 으뜸가는 좋음”이라 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8장) 그러나 다른 좋은 것들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외적인 좋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길게 부연설명을 한다.     


행복은 명백하게 추가적으로 외적인 좋음 또한 필요로 한다. 일정한 뒷받침이 없으면 고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많은 일들은, 마치 도구를 통해 어떤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친구들을 통해, 또 부와 정치적 힘을 통해 수행되기 때문이다. 또 이를테면 좋은 태생, 훌륭한 자식, 준수한 용모와 같이 그것의 결여가 지극한 복에 흠집을 내는 것들이 있다. 용모가 아주 추하거나 좋지 않은 태생이거나, 자식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은 온전히 행복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더 어렵기는 아마도 아주 나쁜 친구들과 나쁜 자식들만 있는 사람, 혹은 좋은 친구들과 자식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죽어서 없는 사람일 것이다. …… 바로 이런 까닭에 다른 사람들은 탁월성을 행복과 동일시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행운을 행복과 동일시하는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8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기보다 좋은 것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외적인 좋음’이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좋은 것이라고 인정한다. 돈은 좋은 것이다. 권력은 좋은 것이다. 부모를 잘 둔 것도 좋다. 잘난 자식을 둔 것도 좋다. 외모가 빼어난 것도 좋다. 힘이 되어주는 친구들도 좋다. 의심할 바 없이 영혼의 탁월함이 가장 좋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런 외적 조건들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외적인 조건들이 얼마나 필요할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오직 내면의 덕만을 중시했다.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 불행을 겪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지상의 세계는 잠시 다녀가는 곳이며 영혼의 참된 고향은 천상의 세계라 여겼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돌아갈 천상의 고향 같은 것은 없다. 그는 지상에서 행복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지상의 가치들에도 행복의 문을 열어놓았다. 이것은 철학자의 온건한 지혜였을까, 아니면 타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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