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에피쿠로스학파가 동경하는 이상적 인간인 현자는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 곧 자족하는 사람이다. 그는 헛된 망상에서 비롯한 욕망을 좇지 않고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만을 충족시키면서 간소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 자족함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자족함의 가장 큰 열매는 자유이다.”(<쾌락>, 35쪽)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가?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 해결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숙제들은 아무런 객관적 필연성도 없는, 오직 ‘욕망’이라는 주관적 필연성만 있는 것들이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 자신을 옭아맨다.
자유로운 삶은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군중이나 실력자들 밑에서 노예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은 모든 것들을 지속적인 풍요 속에서 소유한다.(<쾌락>, 34쪽)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은 내 힘으로만 충분히 채울 수 있지만 헛된 욕망을 채우려면 외적 조건이 많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외부적 선’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외부적 선은 말 그대로 나의 밖에서 주어지므로 그것을 얻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 어느 나라, 어떤 부모,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고, 어떤 기회를 만났는가 등등에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라 결국 외부적 선은 운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헛된 욕망이 많은 사람일수록 운수의 변화에 일희일비하고 헛된 욕망이 없는 사람은 운수의 지배를 덜 받는다.
운은 아주 적은 일들에 있어서 현자를 방해한다. 하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일들은 지성이 다스려왔으며, 평생 동안 다스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쾌락>, 17쪽)
그러므로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자신의 처지에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고요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운수나 외적 조건에만 휘둘리지는 않는다. 사람을 가장 속박하고 불안을 주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다. 그러므로 즐거운 삶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곧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내가 가장 즐거울 수 있을까?
플라톤은 정치 공동체인 폴리스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인간들 각자는 자족하지 못하고 불완전하므로 다른 사람과 폴리스를 이룰 때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된다. 즉 플라톤에게는 폴리스가 자족적인 삶의 최소 단위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게 자족적인 삶의 최소 단위는 인간 각자다. 정치 공동체의 형성은 인간의 본성에 따른 필연적 과정이 아니라 우연적 과정일 뿐이다. 즐거움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국가 공동체라는 것은 오히려 달가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회를 이루면 타인에게 속박될 수 있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타인에게 속박되지 않으려면 되도록 강한 힘을 가져서 (권력이든 돈의 힘이든) 남들을 힘으로 눌러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길은 아예 사회적/정치적 갈등 관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의 안전이, 고통을 제거하는 어떤 힘 또는 부에 의해서 어느 정도까지 달성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순수한 안전은 대중으로부터의 고요와 은거로부터 생겨난다.(<쾌락>, 16쪽)
에피쿠로스는 되도록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물러날 것을 권한다. 여기서 우리는 헬레니즘 시대의 가치관이 희랍인들의 고전적 이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란 정치적 존재였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 것을 주문한다. 플라톤이 정의로운 나라에 대해 그토록 절실하게 사유했던 것도 에피쿠로스에게는 감흥을 주지 못했다.
정의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의 상호 관계에서 서로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계약이다.(<쾌락>, 21쪽)
이것은 소피스트들이 하던 주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부 소피스트들처럼 정의를 무시하거나 다른 대안적 정의를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에피쿠로스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정의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쓸모 있기는 하나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이 될 만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정의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에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지는 않다. 인생은 오직 즐기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니까.
에피쿠로스가 사람들로부터 물러날 것을 권한다 해서 그가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린 고독한 삶을 칭송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 역시 관계에 대해 말한다. 즐거운 삶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 추구하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 앞서 말했듯 정치적/사회적 관계는 아니다. 공적인 일이나 사회생활에 몰두하는 삶은 에피쿠로스가 보기에는 즐거움이 없고 피곤하기만 한 삶이다. 우리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사적인 인간관계 속에서다. 그렇다면 연애는 어떨까? 물론 연애는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관계는 아니다. 애인 관계는 너무나 강렬한 정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즐거움과 동시에 가장 큰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어떤 관계인가? 공적인 업무와 무관하면서 괴로움은 최소화하고 즐거움을 최대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관계는 바로 친구 관계다.
일생 동안의 축복을 만들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의 소유이다.(<쾌락>, 20쪽)
에피쿠로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우정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즐거운 삶을 사는 법은 무엇인가? 헛된 욕망을 버리고 공적인 일이나 불필요한 사회관계를 최소화하고 친구들과 많은 시간 보내기. 에피쿠로스가 아테네 근교에 집을 마련하여 친구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며 지낸 것은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은 폴리스가 붕괴한 헬레니즘 시대의 면모와 가치관을 잘 보여주지만 동시에 고전적 가치관이 시대적 흐름에 대응한 측면도 있다. 종교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세계가 혼란스럽고 삶이 불안할 때 많은 이들이 종교에 의지하곤 한다. 에피쿠로스의 시대가 그랬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그 뒤를 이은 로마 제국의 정복사업을 계기로 세계가 확장되면서 동방의 종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순화시켜 건강한 욕망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세속적 욕망을 초월적 능력의 힘을 빌려 충족시키려는 시도로 전락한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신에게 기도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기복신앙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삶의 목적이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종교에 의지해야겠는가? 신이 나 대신 즐거워해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신들이 우리에게 제공해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이런 생각 또한 어리석다고 여겼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신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무익하다.(<쾌락>, 34쪽)
이것은 인간의 힘을 과신해서 한 말이 아니다. 힘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돈이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만큼 돈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신에게 기도한다. 고급 승용차를 원할 때도 신에게 기도한다. 더 큰 집을 원할 때도 기도한다. 이것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재산과 소유는 우리에게 괴로움만 준다고 한다. 그는 오직 소박한 즐거움을 원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으므로 신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신앙은 전부 무의미할까? 에피쿠로스는 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기도하기보다는 그들을 이상적인 존재의 표본으로 삼고 본받을 것을 권한다.
축복받았으며 불멸하는 본성은 그 스스로 어떤 고통도 모르며 다른 것들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 본성은 분노나 호의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나 호의는 단지 약한 것들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쾌락>, 13쪽)
신들은 자족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신들은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신들은 자기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존재이기에 굳이 다른 이들을 괴롭힐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나약한 인간들처럼 사사로운 분노나 호의를 품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신들의 모습을 현자의 이상으로 삼으라고 권한다. 이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기복신앙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처방이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오히려 신들에게 의존하는 예속적인 삶을 살지 말고,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어라. 자족할 줄 아는 현자는 이미 신과 같은 존재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올륌포스의 신들처럼 고요한 평화를 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아무리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설파해도 사람들이 종교의 힘을 쉽게 간과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세속을 넘어선 욕망, 곧 불멸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아니, 욕망 이전에 소멸에 대한 공포가 원인일 것이다. 에피쿠로스도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죽음 때문에 안전하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다.(<쾌락>, 28쪽)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신들에게 기도한다. 신들이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아니 믿고 싶기 때문이다. 신에게 종교적으로 의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해도 죽음 이후의 불멸을 꿈꾼 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길을 가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삶으로 죽음을 극복하기보다 죽음 자체를 없애서, 곧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버린다.
에피쿠로스는 플라톤처럼 비물질적인 존재인 영혼이 불멸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뿐이다. 모든 존재는 원자들의 결합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원자가 분해되면 존재는 해체되어 사라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죽음이란 인간을 이루고 있던 원자들이 분해되는 과정이다. 분해된 것은 감각을 갖지 못하는데,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쾌락>, 13쪽)
간단히 말해서, 죽으면 감각이 사라지고, 그 결과 우리는 죽음을 감각하지 못한다. 누구나 죽음을 말하지만 죽음을 지각한 사람은 없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쾌락>, 43~44쪽)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허한 욕망을 버리고 신과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기복신앙이 퍼뜨리는 공허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불안과 공포의 시대에 여전히 이성의 힘으로 행복을 성취하려 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