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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Oct 28. 2024

열정과 기질

훌륭한 직장과 예쁜 아이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

대학을 준비하던 시절엔 멋진 법관이 되고 싶었다. 법관이 되기 위한 꿈을 향해 서로를 격려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쳐나가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삶이 너무나 근사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행히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법관이 뭐하는 건지 이런 것은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차선책이라는 게 없었다는 건 어쩌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2․3지망이라는 용어를 원서를 쓰던 날 처음 알았으니 깊이 생각했을 리가 없고, 담임선생님과의 개인면담전에 모여앉아 수다떨던 친구들의 거수로 결정된 신문방송학과를 2지망난에 채워넣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덕에 2지망이라 해도 나쁠 것 없는 결과였지만, 난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신입생 시절을 2차례의 학사경고와 함께 마무리하며  결국 법학과에 재도전하기 위해 재수를 선택했다. 그런데 재수생활의 명분이었던 법관의 꿈은 재수생활을 하면서 점점 희석되어갔다. 내가 법관이 되고 싶은 이유가 단지 뭔가에 몰입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즐거운 기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법관이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하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극도의 몰입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내가 대학 1학년 시절 방황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적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몰두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지 못해 즐거운 몰입상태를 유지할 만한 에너지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병중에 우겨서 시작한 재수생활이라 중도에 그만둘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1년을 다 채우긴 했지만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실패였다.


원래 다니던 대학으로 돌아와서 나름대로 적응을 위해 애쓰면서도 딱히 뭘 하고 싶다던지, 뭐가 되고 싶다던지 하는 생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저 막연히 작가가 멋져 보이기도 하다가, 별안간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가보기도 하고, 친구들 따라 방송국 시험도 봤지만 특별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재수라는 극약처방을 써가면서까지 구하던 ‘즐거운 몰입’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뭘 해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숨 막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여전히 고3때 자신에게서 확인한 저력에 대한 막연한 믿음뿐이었다. 복학을 하고도 2년이 넘도록 주어진 수업을 챙겨 듣는 것조차 버거웠다. 정말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지각과 결강을 일삼았으니 성적은 간신히 학사경고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아빠의 병으로 얻은 장학금의 최저 학점기준인 2.5를 넘기지 못한 학기가 두 학기나 된다. 지금 생각해도 아빠에게 너무나 죄송스럽기만 하다. 


내가 달라진 것은 대학 3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아빠가 병으로 직장을 나오신지도 3년이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에 정신이 팔려 어이없게도 지방대에서 영어강좌를 듣고 있었다. 제대후 복학할 때까지 고향에서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남자친구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하나로 아빠에게 그 학교 영어강좌가 전국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빠는 공부하겠다는 딸이 대견했던지 더이상 묻지도 않으시고 서둘러 전주에 거처를 마련해주셨다. 아빠의 고교 동창 딸에게 과외를 해주면서 학교를 다니라고 하셨다. 나도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는 분이었고, 또 이것저것 가릴 정신이 없었던지라 그러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빠의 공주였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공주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착각이었다. 내가 아빠의 공주인 것은 변함이 없었으나 아빠의 왕국은 이제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아빠 친구의 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다름을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우리 아빠의 빽이 되어드려야 하는구나! 내가 흔들리면 우리 집을 지킬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관심의 80%는 아빠의 땀과 희생에 대한 보상이었구나. 아빠가 벌어놓으신 사회적 자산은 이미 바닥나고야 말았다. 이젠 내가 벌어서 아빠를 지켜 드려야한다!’ 


그 이후 나의 대학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2점대에서 4점대로 뛰어오른 학점은 오히려 변화의 아주 미미한 일면일 뿐이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남자친구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어는 내게 새로 발견한 신세계였다. 학교의 영상도서관으로 등교해 일본 드라마와 영화 속에 빠져있다가 짬짬히 수업을 들어가는 식으로 생활이 꾸려졌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순전히 일본으로 대학원 교환학생을 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취업을 위한 준비가 철저하기 못했던 탓에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계산도 있었던 것 같다.


대학원 입학공부보다 일본어수업이 먼저였고, 그러다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재도전하면서도 입학공부보다 교환학생 자격조건이었던 일어시험을 준비했다. 결국 그렇게나 원하던 일본 교환학생 시험에 합격하고 대학원 1년을 일본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와중에 무리해서 영어공인 점수까지 만들어 놓았던 걸 보면 어딘가 취직은 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일본어와 영어가 가능해지면 취직에 좀 유리하겠다는 판단도 했던 기억이 나니까.


일본으로 떠나면서 3년반이나 지속되던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아니 일본행을 결정했다는 것 차체가 너무나 분명한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와 사귀던 시절 집안형편은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세계적 불황의 여파가 우리집만 피해갈 리 없었다. 


아빠가 하시던 사업에서 내리 사기를 당하시면서 감정적으로도 흔들리기 시작하셨다. 엄마도 알콜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계셨다. 집안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일본으로 떠나기 위한 서류상의 재정보증을 할 이천만원을 만들지 못할 정도였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고 했다. 엄마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꼭 일본으로 가야겠냐고 애원하셨지만 나의 태도는 완강했다.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나까지 무너지면 우리 집은 끝장이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경제상황도 있었지만 나는 사회에 나갈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이대로 나가 정착하는데서부터 인생을 끌어간다면 그 길이 너무 고생스러울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점에선 아빠도 같은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빠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일본에 보내려고 애를 써주셨다. 둘째 이대로는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산에 있는 집에서 나온 것은 단지 학교가 멀기 때문은 아니었다. 집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아빠 엄마의 사는 모습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렇게 상반되는 이유를 가지고 나는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운이 좋았다. 우선 연구실 배정부터 그랬다. 교환교였던 와세다에 신문방송학과가 없어서 나는 별수 없이 다른 연구실을 택해야 했는데 그 순간 ‘이거다!’싶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디자인할 수 있겠구나! 꿈꾸는 캐릭터로 살아보고 싶었다.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유복한 집에서 곱게 자란 재능 있고 심성착한 아이’가 내가 추구했던 컨셉이었다. 교환교가 결정되고 출국을 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빠듯한 형편에 독기로 적금을 부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여기에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장학금까지 받게 되면서 야끼니꾸집에서 불판을 닦지 않고도 일본의 생활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바쁜 동료들의 시간을 더듬거리는 내 말을 해독하는데 쓰게 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혹여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가까이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1달 정도 지났을 때, 이게 아니다 싶었다. ‘이러려면 뭐 하러 어렵게 여기까지 온거냐?’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대답은 궁색하기만 했다. 드라마속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온 것이라면 스스로 드라마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1년엔 사람을 담을 거라며 일부러 책 한권도 챙겨오지 않은 나였다. 거절당하면 다시 시도하면 되고, 오해를 받으면 풀면 되는 것이다. 드라마가 별건가? 그 과정이 드라마가 아닌가? 


우선 동료들을 기숙사로 초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당시 한국유학생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적인 모임에 나갈 시간도, 또 그렇게 쓸 돈도 부족했다. 이를 알고 있는 일본학생 입장에서는 한국인 유학생을 모임에 부르기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의 파티로 내가 그들을 향해 문을 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파티에 참석했던 친구들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모임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고 그중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생겼다. 


그들은 애니메이션과 트렌디드라마로 배운 나의 서툰 일본어를 재미있어했고, 환대받고 있다는 확신에 나는 점점 내 페이스를 찾아갔다. 현장조사가 많은 연구실의 특성도 내가 좀 더 편하게 그들과 섞이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한창 환경저널리스트로서의 명성을 쌓아가시던 교수님께서 ‘한국에서 환경저널리즘을 공부하러 일부러 유학 온’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즐기신 덕에 나는 일본학생들보다 더 많은 공식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실 메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올 무렵 연구실 동료들이 마련해주었던 송별회를 잊지 못한다. 신주쿠 하얏트 스카이 라운지에서의 정찬, 레인보우브릿지 드라이브, 오다이바의 깜짝 하나비. 그들은 한국이라는 왕국에서 온 공주를 마음을 다해 송별했다. 마음을 다해 그녀를 보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날 우아한 소공녀 박소연은 오다이바의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학과 공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일본교환학생 기간탓에 체계적으로 논문을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허겁지겁 면피용 논문을 쓰느라 많이 힘이 들었다. 스스로를 유혹하지 못하는 주제에서 24시간 자유로울 수 없는 공부가 마치 형벌처럼 느껴졌다. 공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빨리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나이 스물다섯, 한창 좋을 나이에 항상 허름한 청바지에 배낭차림인 스스로가 지겹기도 했다. 모질게 말고 무난하게 살고 싶었다. 그냥 적당히 해도 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직업이면 좋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 떠날 때의 각오를 생각해보면 참 무책임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다. 아니면 그냥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니 일본으로 떠나야하는 이유로 내걸었던 첫 번째 사유는 그저 마음 편하기 위해 끌어다 붙인 대외설득용 명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내 공부를 지겨워했다. 아빠마저도 어디라도 좋으니 아무데라도 들어가라고 하실 정도였다. 그러다 마침 현재 회사의 직원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왔고, 워밍업 삼아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왔다 갔다 했다. 제대로 준비하자면 1~2년은 기본이라는 시험이 딱 한 달 남아있었다. 떨어져도 억울할 것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 편히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시험에 붙었고 집안에선 참으로 자랑스러운 장한 딸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셔서 다른 생각은 할 여지도 없었다. 


 

3은 그녀의 대학입학에서 입사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특이할 것 없는 삶이었다. 아마 나를 포함한 그녀의 여자 선후배들이 대부분 비슷한 스토리를 갖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니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왜 하필 내게 자신의 삶을 띄우고 떠난 걸까? 한 글자도 허투루 읽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을 모두 다 읽고 나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4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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