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dy Saucy Feb 19. 2019

The Multiplayer#2

다시 런던으로

    나는 그렇게 다시 런던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런던에 돌아가도 경력 단절 없이 바로 일할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쳤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서 예약해둔 임시숙소로 이동했고, 그날 저녁 바로 그 친구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 나 런던으로 돌아왔어. 언제 인터뷰를 볼 수 있을까?' 시차 때문에 해가 중천에 뜬 시각 눈을 떴다. 분명 내 메시지에 대한 답장이 와 있을 거라는 기대에 핸드폰은 확인했지만 아무 답장이 없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친구를 보채고 싶지 않았기에 기다렸다. 그다음 날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 런던으로 네가 다시 돌아와서 너무 기뻐. 얼른 보고 싶다. 우리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 느낌이 왔다. 아 물 건너갔구나. 그다음 날 그녀와 석사 시절 같이 친하게 지냈던 다른 친구와 함께 셋이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 네가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상사들에게 알렸어.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더 이상의 어시스턴트는 채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인터뷰는 무산된 것 같아. 미안해... "


    속이 답답해졌다. 이 인터뷰만 믿고 날짜를 확정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친구들과의 재회는 좋았으나 우울해진 머릿속은 나 스스로를 잠식시켰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없었다. 한국에서 모아둔 돈은 런던으로 돌아올 준비와 초기 정착금으로 다 사용해 버렸고, 그나마 엄마가 몰래 주신 비상금으로 약 2개월 간은 일을 하지 않아도 런던에서 렌트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나왔다. 우울한 감정에 잠겨있을 시간이 없었다. 감정은 짓누르고 살아남기 위해 뭐든 시작해야 했다. 깨어있는 동안은 모든 패션 관련 구직사이트를 브라우징 하며 가능한 모든 곳에 이력서를 뿌리기 시작했다. 몇 군데에 지원했는지 셀 수도 없지만 아마 백 군데는 넘게 지원한 것 같다. 영국 취업시장에 뛰어든 내 경험을 통해 보자면, 한국에서의 경력은 영국 패션계에서 쉽사리 인정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물론 참작은 하겠지만 한국에서 주임, 대리의 경력이라도 영국에서 주니어 디자이너로 바로 가는 것은 힘들다는 인상을 받았다.


    리테일 브랜드 디자인 경력을 가진 나는 개인적으로 럭셔리 브랜드 디자이너로 경력을 전환하고 싶었고, 같은 포지션으로 할 수 있는 대로 기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쉽지 않았다. 영국 내 럭셔리 브랜드에서는 더구나 리테일 브랜드 경력은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유는 일의 진행 과정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 시절의 인턴 경험이 너무나 중요했다. 업계의 인턴 경험은 제로 베이스에서 레벨을 한 단계 업시켜준다. 영국의 패션 브랜드에서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관련 업계 인턴경험이 있는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한다. 또한 럭셔리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리테일 브랜드로 직종 변환은 리테일 브랜드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가는 것보다 비교적 수월하다. 보통 럭셔리 브랜드에서 인턴쉽을 시작하면 무보수로 일하게 된다. 종종 예외도 있으나, 대 다수가 그렇다.


   그렇다면 살벌하게 비싼 런던에서의 삶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첫째, 부모님의 금전적인 도움이 가능한 경우. 둘째,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여윳돈을 마련하여 생활하는 경우. 나는 두 번째 경우였다. 우리 집은 더 이상 나를 금전적으로 지원해 줄 형편도 안될뿐더러 서른이 넘은 나이에 부끄럽게 부모님께 더 이상 손 벌리고 싶지 않았다. 친구 회사와의 인터뷰가 무산된 이후, 숨고를 시간도 없이 바로 파트타임 잡을 구하기 시작했고, 런던의 작은 부티크에서 샵 어시스턴트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패션 관련된 채용공고만 살펴보았고, 여러 가지 조건이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면접 전 이메일로 이력서를 첨부햐여 지원했고, 샵 오너의 여러 가지 질문에 정성스레 답변했다. 이후 샵 매니저와 1:1 인터뷰를 보고서 정식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의 근무환경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들 그리고 매니저와 오너와 다른 스태프 멤버들 간의 관계가 내가 다녔던 회사들에 비해 평면화 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유동적인 스케줄 조절이 가능했던 것이 내겐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혹시나 앞으로 잡힐 인터뷰에 잠석하려면 그것이 내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브랜드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도 일어났다.


   런던의 한 벤더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 경력이 꽤나 그들의 니즈에 맞았기에 인터뷰를 보고 싶다고 했고, 주니어 디자이너 포지션이었기에 꽤나 구미가 당겼다. 전날 밤 하루 종일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하고 질의응답을 연습하며 인터뷰를 준비했다. 런던 힙스터들의 요점이자 요즘에도 여전히 핫한 쇼디치에 위치한 회사였다. 30분 전에 도착하였지만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하며 숨을 고르고 준비했던 질의응답을 다시 머릿속으로 되뇌며 연습했다. 그리고 15분 전에 회사 빌딩에 들어갔다. 런던에 돌아온 후 그토록 기다렸던 첫 면접이었기에 꽤나 떨렸다. 웨이팅 룸에서 기다리면서 떨지 않고 인터뷰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회사의 디렉터와 미팅룸에 함께 들어갔다. 간단히 스몰토크로 인사를 나누고 긴장을 풀었다. 그는 한국 패션의 빅 팬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에서 내가 다녔던 회사를 잘 알고 있었고, 좋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런던에서 작은 회사에서 시작하려고 하는지, 어쩌면 한국에서 더 좋은 삶을 누릴 수도 있는데 왜 런던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무엇이 이런 결정을 하게 만들었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서 이것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에서 계속 디자이너로 일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나이를 먹어간다면 이 곳에 돌아올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마음먹었을 때 돌아오자고 생각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새로운 환경에서 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보고 싶었어요." 그는 포트폴리오를 보자고 헀고, 나는 석사 시절 만들어 놓았던 컬렉션 포트폴리오와, 벤더 회사를 다니던 시절 틈틈이 작업해 두었던 샘플 포트폴리오를 보여줬다.


필자의 졸업컬렉션 포트폴리오의 일부



" 이런 포트폴리오는 나는 관심 없어요."


그가 말했다. " 나한테 뭘 보여주고 싶은 거죠? 당신은 벤더 회사에 지원했어요. 석사 공부를 하면서 당신이 만들어낸 창의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Zara, Bershka, Mango, Primark, GAP, M&S, Free People같은 리테일 브랜드를 상대하며 비즈니스를 해요. 잘 팔리는 옷 저렴한 가격에 트렌디한 옷. 그런 옷을 디자인할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이곳은 럭셔리 디자인을 하는 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가져온 샘플 포트폴리오는 대체 무슨 디자인 프로세스를 보여주고 있는 거죠? 전혀 이해되지 않아요. 당신이 예쁜 옷을 디자인한 것은 알겠지만 어떻게 영감을 받고 어떻게 그것을 상업적으로 풀어내는 거죠? 나는 그걸 알고 싶어요." 너무 당황스러웠다. 악평도 이런 악평이 없었다. 당황스러워지자 얼굴이 붉어졌고 말을 더듬거리게 되었다. " 가장 최근에 만든 포트폴리오들을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석사 때 만든 컬렉션 포트폴리오를 통해서 제가 어떻게 컨셉을 잡고 디자인에 접근하고 디벨롭하는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좀 더 창의적인 부분을 보실 수 있게요. 그리고 일하면서 만든 샘플 포트폴리오는, 제가 벤더 회사에 다녔기 때문에 바이어의 니즈에 맞게 그들이 보내주는 테마와 컨셉에 맞게 디자인을 풀어 나가요. 그리고 그들의 구미가 당기는 샘플을 디벨롭하여 미팅 때 바이어들에게 제시하는 거죠. "

  

매거진의 이전글 The Multiplayer#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