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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Dec 05. 2020

괴물은 괴물이 아니다.

#8.  <아몬드>  +  <괴물들이 사는 나라>

손원평, <아몬드>, 창비

인간의 편도체는 아몬드처럼 생겼다. 그 크기가 작으면 불안, 공포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한다. 윤재는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묻지 마 폭행 살인의 피해자로 엄마와 할머니가 곁에서 처참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윤재를 ‘괴물’처럼 본다. 그들은 괴물을 범상치 않은 것, 평범함과 정상을 잣대로 저울질했다.     


 “할멈, 사람들이 왜 나보고 이상 하대?”

 할멈은 내민 입을 집어넣었다.

 “네가 특별해서 그러나 보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 걸 배기질 못하거든. 에이그, 우리 예쁜 괴물.”     


 할머니는 윤재를 ‘예쁜 괴물’이라 불렀다. 할머니에겐 평범한 사람들이 보는 이상한 시선이 아니라, ‘특별한’ 시선으로 윤재를 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사랑, 윤재를 정상인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엄마의 주입식 감정교육으로 초등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그 사건 이후 혼자가 된 윤재는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괴물 같은 시간과 또 다른 괴물 곤이(이수)와 마주한다. 곤이는 윤재와 닮은 아이였다. 우연히 닮은 외모 때문에 윤재는 그의 대역을 맡게 되고,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놓친 곤이가 겪게 된 마음의 상처를 알게 된다. 감정 결핍과 감정 과잉의 아이, 윤재와 곤이는 평범의 범주를 벗어난 탓에 세상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아이들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 아래 비교적 안정적인 정서 환경에서 자란 윤재와 달리 곤이는 보육원과 소년원을 오가며 폭력적 세상으로부터 얻은 트라우마를 적대와 분노로 표출한다. 그리고 윤재를 괴롭힌다. 아무리 괴롭혀도 반응이 없는 윤재에게 곤이는 관심이 생기고 둘 사이에는 ‘특별한’ 우정이 싹튼다. 어느 날 곤은 학교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를 받고 그 일은 곤이를 더 엇나가게 만든다. 윤재는 곤이를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곤이를 대신해 칼을 맞는다. 윤재는 그 순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 사건이 일어났던 날, 윤재를 대신해 죽어가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음을. 할머니는 사랑이 “예쁨의 발견”이라고 했다. 윤재는 곤이의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 이런 감정을 깨달아간다.     

모리스 센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 시공주니어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장난꾸러기 맥스가 자신을 억압하는 엄마의 꾸지람에 분노를 느끼며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모험을 다녀온 이야기다. 맥스는 “괴물 중의 괴물”, 괴물들의 왕이 되어 한바탕 소동을 벌이지만 쓸쓸해지자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되돌아온다. “무서운 소리로 으르렁대며 이빨을 갈고, 무서운 눈알을 뒤룩대고, 무서운 발톱을 세우며” 맥스에게 가지 말라고 울부짖는 괴물들이 신기하게도 무섭지 않다. 둥글둥글 곡선으로 처리된 그림 속 괴물들은 동물의 모습과도 닮았다. 원초적인 욕망과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괴물들. 맥스가 괴물이 되어 신나게 난동을 벌이다가 돌연 쓸쓸해지는 이유는 뭘까? 곤이 강해 지기 위해, 상처 받는 것을 멈추지 못할 바엔 상처 주는 사람이 되겠다 결심하고 자기 파괴를 향해가는 모습이 바로 늑대 탈을 쓴 맥스의 모습과 겹쳐졌다.      


 괴물은 사실 괴물이 아니다. 실체가 없다. 괴물의 영어 어원 ‘monster’는 보통의 세계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환상의 존재이자 신으로부터 내려온 현실의 경고, 계시와 같은 상징적 의미로 여겼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괴물(怪物)이란 기이하고 의심스러운 상징물이었다. 그렇다면, 윤재와 곤이, 맥스는 우리에게 어떤 경고를 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안타깝게도 괴물들이 사는 세상이었던 건 아닐까? 자크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에서 사람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성’을 본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하나의 동일성에 가두는 모든 것을 폭력으로 규정짓는다. 보통의 삶에서 벗어난 윤재와 곤이는 이런 폭력으로부터 괴물이 된 아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윤재의 독백은 공감 불능의 사회를 꼬집고 있었다. 뜨끔하다. 만약 윤재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비밀을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과 곤이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괴물들이 사는 세상과 작별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누구든지 웃고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혐오의 칼질이 지금 누구를 겨누고 있을까. 맥스가 한바탕 소동 후 깨달은 쓸쓸함은 철사형의 칼끝에 윤재가 쓰러졌을 때, 흘렸던 곤이의 눈물, 둑 터지 듯 밀려든 그 느낌일 것이다. 맥스가 늑대의 탈을 벗고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윤재도 그렇다.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은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의 부재는 분명 윤재에게 위기로 다가왔지만, 심박사와 곤이, 도라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윤재는 진짜의 삶에 다가갔다. 윤재와 곤이의 우정이 특별한 것은 할머니가 말했던 “예쁨의 발견”, 환대에서 비롯된다. 환대란 차이에서 오는 적대감을 버리고 나의 삶, 나의 공간으로의 접근을 허락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불행이라 여기는 위기의 순간이 우리가 애써 눈감고 보려 하지 않았던 새로운 교감의 기회일 수 있다. 윤재처럼 나도 부딪혀 보기로 한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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