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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Dec 20. 2020

꿈과 이상이라는 비밀

#12.  <달과 6펜스> +  <인어를 믿나요?>

 김기덕 감독이 코로나 19로 사망했다. 동유럽의 낯선 나라 라트비아에서 가족도 없이 화장되었다는 소식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유럽 3대 영화제의 상을 모두 거머쥔 감독이라지만,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보지 않았다. 유일하게 본 영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던가. 그마저도 희미한 낡은 기억이 되어버렸다. 미투 사건 이후 사건이 제대로 종결되지 않았지만, 그는 구소련으로 떠났고, 비밀은 남은 채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갔다. 얼마 전 갑자기 들려온 그의 부고 소식은 뜻밖에도 <달과 6펜스>를 떠올리게 했다. 평소 그의 작품이 지닌 거칠고 악마적인 매력, 비범한 천재성에서 나온 예술 편력들이 찰스 스트릭랜드를 떠오르게 했나 보다. 도대체 예술가는 왜 범상치 않은 삶을 사는 걸까?     

서머셋 몸, <달과 6펜스>, 민음사.

 40대까지 너무나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다가 돌연 그림에 빠진 남자, 화가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한 소설이 <달과 6펜스>다.  달은 꿈과 이상을 상징하며 6펜스는 현실을 가리킨다. 소설 속 달이나 6펜스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지만, 우리는 안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이 6펜스에서 달의 세계로 떠나는 삶이라는 것을. 스트릭랜드는 나쁜 남자다. 자신의 예술적 광기를 위해 직장도 가정도 버리고 나왔으니 말이다. 부인은 바람난 것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집을 떠나고 처음 정착한 파리에서 그림에만 매진하다 병에 걸린 그를 돌봐주고 도와준 친구 스트로브에게 상처만 남긴다. 그의 부인이 스트릭랜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남편을 버리고 친구를 배신한 결과는 암울하다. 사랑이 식었다고 느끼자 부인 블란치는 자살해버렸다. 파리에서 타히티로 간 그는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며 예술혼을 불태운다. 모든 것을 감싸준 원주민 소녀 아타와 결혼하여 그토록 바라던 그림에 몰두하지만, 나병에 걸리고 죽기 전 일 년 가량은 눈도 보이지 않은 채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 그림들엔 이상하게도 그를 감동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방바닥에서 천정에 이르기까지 사방의 벽이 기이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創世)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거기에는 원시적인 무엇, 무서운 어떤 것이 있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     


천재의 광기, 그는 윤리적으로 보자면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남자였지만, 그림에 관한 그의 마음은 진짜였다. 하루하루의 치열하게 그려온 노동의 가치와 열정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가여운 그의 꿈은 경이로운 비밀이 된다. 또 다른 비밀의 주인공은 그림책 <인어를 믿나요?>에 있다. 수영을 좋아하는 소년 줄리앙은 인어를 좋아한다. 인어를 꿈꾸는 소년은 할머니에게 수줍게 고백했다. “할머니……나도 인어인데.” 할머니가 목욕을 하는 사이 줄리앙은 인어로 변신한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의 굳은 표정에 순간 멈칫했다. 여자로 변신도 모자라 인어라니…. 잠시 후 할머니는 감추어둔 손을 펼쳐 진주 목걸이를 선물한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고통의 의미를 알기에 할머니의 진주 목걸이에 담긴 사랑과 포용에 감동하게 된다. 행복한 표정으로 할머니와 손을 잡고 나선 줄리앙, 인어의 퍼레이드에 동참한 줄리앙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제시카 러브,  <인어를 믿나요?>, 웅진주니어.

우리가 상상만으로 끝내버린 마음속 비밀이 있다. 누군가 가상의 삶을 살 기회를 준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어떤 삶을 꿈꿔볼 것이다. 다른 삶을 꿈꾼다면서 왜 지금 하지 못하는가? 계산을 해보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 삶이 과연 나에게 행복을 줄 것인가부터 묻는다. 어느새 등장한 강력한 내부 검열관은 당장 접으라 말한다. 마흔 넘어 화가로 성공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하지만 말리는 그 일을 기어이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어떤 야만적이거나 폭력적인 모습, 기존의 남들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봐 차마 하지 못한 일들을 하고야 마는 사람들, 스트릭랜드나 줄리앙처럼 말이다. 그의 목표는 화가가 아니라 그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꿈과 이상의 비밀 한편을 보여준 그들에게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든다. 사회·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인가는 차치하고 그들 자신의 꿈에 진심으로 다가간 모습은 분명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어가 꼭 여자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남자도 여자를 꿈꿀 수 있고 사람도 인어를 꿈꿀 수 있다. 상상한 대로, 원하는 대로, 자신의 개성을 분명히 드러낸 사람은 예술가다.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다 용서해 주고 싶다.”라고 말한 화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김기덕 감독을 용서해 주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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