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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 Nov 09. 2022

제주의 구름이 말해주는 것들

-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

제주 서귀포에 오고 3개월이 지난 지금.


얼추 서울에서 가져온 일들이 마무리되고 새로 들어온 프로젝트를 거절하면서, 주말에는 한결 여유로워졌다.


이 얼마 만에 맞이하는 주말다운 주말인지. 휴일다운 휴일인지.


보통 주말에 짬이 나면 아이랑 놀아주거나, 틈틈이 가족들과 나들이를 다녔는데, 마침 처제가 제주에 놀러 와서 집안일을 거들어주면서 토요일 오후에 온전히 내 시간이 생겼다.


내 시간이라니... 지금껏 잠시라도 짬이 나면, 또 다른 일을 기획하고, 또 다른 글을 쓰고, 또 다른 마감을 설정하고 내 자신을 몰아붙이기 바빴던 터라, 나는 이번에도 무의식적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프리랜서 작가로서, 콘텐츠는 곧 돈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살아왔기에, 시간이 나자 다시 뭐든 기획하고 작업해서 돈으로 바꾸려는 습관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자체를, 해본 적이 오래되었고, 그 방법조차 잊어버린 셈.


그때 문득 거실 통창 너머로 세찬 바람이, 죽비처럼 창문을 흔들고 지나갔다.


- 그르르릉


'가만 내가 이러려고 제주에 온 게 아닌데, 멍 때리려고 왔는데...'


정신이 번쩍 들자, 나는 애써서, 정말 안간힘을 다해 노트북을 닫았다.


아무리 제주살이를 시작했지만, 관리비 정산서와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 지로, 자동차세 안내문 등 수많은 고정비를 재촉하는 편지는 그대로 딸려왔기에, 생활에 대한 부담과 불안은 달라진 게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바다와 오름을 거닐고 있으면, 잡념이 바람에 훌훌 쓸려가겠지만, 오늘만큼은 바람이 심해서 집에 있으려니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우선 책 한 권을 들고, 건넌방으로 소풍을 갔다.


그리고는 음악을 틀어놓고 책도 보고, 꾸벅꾸벅 졸다가,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도 본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어색몇 번이나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핸드폰으로 전자책을 뒤적이다가, 바람소리에 퍼뜩 놀라 전원을 끄고 다시 뒹굴어본다.


'마음의 두꺼비집을 아예 내려버리란 말이다!'


벌러덩 드러누우니, 양떼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그 구름을 보고 있자니, 내 생각도, 아집도 마음 가득 흩어진다.



구름은 아예 하늘과 햇살마저 덮을 듯 점점 촘촘히 장막을 친다.


아, 나는 그 구름장막을 보며 생각했다.


마음에도 구름이 필요하구나.


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는지 가만히 알아챌 수 있도록, 구름이 드리워져야 하는 거구나.


구름이 멈추니, 나도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을 덮어버리자, 해가 마지막까지 발광을 한다.


급기야 해는 구름을 다 녹여버리려 했으나...



구름은 아예 하늘을 다 덮는가 싶더니...


심부름 다녀오면서 본 한라산


마침내 화산폭발하듯 분노하는 햇살을 몽땅 끌어안는다.


와...


정신을 차려보니 저녁이다.


나름대로 시간에서 벗어나 제대로 쉬어보려고, 책도 보고 잠도 자고, 명상도 해보려했지만 다 실패했는데...


구름을 보다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듯, 아무일도 아닌듯 하루가 간 것.


앞으로는 마음이 불안을 담보로 뭔가를 자꾸 재촉할 때, 종종 구름장막을 치려 한다.


그리고는 자연에 스며들어 더 자주 빈둥거려야지.


구름처럼 어슬렁어슬렁 바람에 몸을 맡겨야지.

제주 논짓물에서 찍은 구름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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