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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주형 Dec 13. 2022

그 노트

걘 저에게 절대 그 노트를 보여주지 않았어요.


시간은 거슬러 학기 중반으로 갑니다. 같이 놀던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 다니던 아이가 있었어요. 저는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아이는 스스럼없이 제게 붙었어요. 그 아이를 친구로 받아들이면서 많은 소음이 있었어요. 걔는 험담을 하다가 팽 당한 거다, 만류를 했는데도 저는 그저 혼자 다니는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어요. 저는 종종 혼자 다니는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대게 그 친구들은 착했고,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조금 많이 낯을 가렸을 뿐이었죠. 저도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있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걔는 그게 제 얄팍한 동정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관계를 맺으면 아주 깊어져야만 한다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지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만났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그 친구는 제게 속마음을 자주 이야기했고, 저는 자주 들어줬어요. 그 친구는 저더러 왜 자신만 비밀을 얘기하냐고 했고, 전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깊은 관계라고 믿고 속마음을 털어놨어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글쎄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요.


저는 조용한 사람을 좋아했어요. 늘 그래 왔던 것 같아요. 아주 고요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람. 한 학년 위인 오빠를 짝사랑했는데요. 계기는 사소했어요. 사람이 몇 없던 신축 초등학교에서 오 학년과 육 학년이 마주치는 것은 다반사였고, 대부분이 익숙한 얼굴이었어요. 학기 초에는 한 반에 열 명으로 시작했다가 졸업식에는 서른 명으로 늘었던, 조금은 기이한 내부 사정을 지닌 학교였지요.


무튼 그랬어요. 저는 여름을 떠올리라면 그 오빠가 떠올라요. 아주 고요한 학교 안. 친구들은 모두 운동장에 있고, 한 학년 위인 육 학년들도 모두 운동장에 있고. 전 다급히 반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었어요. 작은 체구의 초등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신발끈을 고치곤 했는데요. 그때 그 오빠가 계단을 내려왔어요. 아주 고요한 걸음이었죠. 우당탕 하는 소음들이 익숙했던 또래들과는 달랐어요. 오빠는 잠시 멈춰 밖을 보았다가, 제 쪽을 보았다가, 문을 밀고 나갔어요. 제 시선은 그 오빠를 따라갔지요.


그게 첫 마주침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게 남은 기억이에요. 계단을 오고 가다가 참 자주 마주쳤는데요. 제가 짝사랑을 인정한 계기는 회장 선거였어요. 그땐 겁쟁이가 아니었는지 아무튼 회장 선거 같은 것에 나갔었는데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낙선 전화를 받았는데, 눈물이 나진 않았어요. 허탈했죠. 득표수 차이가 꽤 났던 걸로 기억해요. 상대는 걔였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까지는 아주 시끄럽고, 선배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는 친구였거든요. 저는 조용한 걸 좋아하고, 글쎄 선배들이랑은 친해질 계기가 없었으니까요. 떨어질 건 알고 있었는데 그냥 내 얼굴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간 개표 현장에는 그 오빠가 있었어요. 오빠 옆엔 어떤 여자분이 있었는데 둘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게 좀 슬펐던 것 같기도 해요. 언니는 오빠의 팔을 치면서 아주 친밀하게 말을 걸었고, 오빠는, 글쎄 조용했다고 해야 할까. 말을 거의 하지 않았거든요. 언니는 저를 가리키며 ‘난 네가 되길 바랐는데. 아 아쉬워. 내 친구들은 다 너 뽑았어. 야 너도 얘 뽑았댔지?’ 했어요. 오빠의 팔을 툭 치면서 말이죠. 전 그때 오빠가 아니라고 하면 어쩌나, 좀 마음을 졸였는데요. 오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를 한 번 보더니, 다시 투표용지로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응’ 했어요. 그때가 오빠의 목소리를 들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것 같아요.


지독한 짝사랑이었던 것 같긴 한데,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할 수 있지도 않았고요. 오빠의 이름조차도 몰랐고, 그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걸요. 다른 사람들은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마주치게 되던데, 오빠는 하교하기만 하면 어디로 숨어버리는 건지, 단 한 번도 밖에서는 마주치질 않아서 지금은 좀 꿈같기도 해요. 그런 사람이 정말 있었나, 싶고.


그런데 걔가 그 짝사랑을 끌고 나온 거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말해주고 저더러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라 했어요. 걔는 반에서도 한 명을 지목했고, 육 학년 중에서도 한 명을 지목했어요. 비밀을 말하는 건 용기 있는 행위니까, 용기를 낼 만큼 저를 깊게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전 제 짝사랑을 고백했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간직했던 마음을요. 전 걔 덕에 오빠의 이름도 알게 되었고, 오빠가 제법 인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육 학년 교실로 올라가면 오빠는 늘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고 했어요. 걜 따라 처음으로 한 층을 더 올라가 보았을 때 그 오빠가 있었는데요. 걔의 말과는 달리 아무도 오빠의 옆에 있지 않았지만 아무튼 전 걔를 믿었으니까요.


고백할 생각은 없었어요. 사랑이라는 건 사람을 겁쟁이로 만드니까요.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후배가 갑자기 좋아한다며 고백하는 장면은 웃기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걔는 저에게 고백을 종용했어요. 멍하니 있다가 뺏길 거라고. 전 상관없었거든요. 사랑이 소유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마음이 통하면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할 수 있었거든요. 걔는 빼빼로 데이 날 저의 등을 떠밀었는데요. 대신 고백을 전해 주겠다며 친구에게 받은 제 빼빼로를 가지고 사라졌어요. 그 빼빼로가 제대로 전달된 건 맞는데요, 걔가 고백을 했다더라고요.


무튼 거절을 당했다나 봐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으니까요. 걔는 전에도 한 오빠한테 고백한 전적이 있어요. 창문을 열어두고 반대편에 있는 오빠한테 좋아한다고 외치더라고요. 그 용기가 참 멋있었는데 걔는 어째서 용기를 냈던 걸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오빠가 거절한 게 한편으론 기뻤는데, 한편으론 우울했어요. 그땐 친구가 거절당했다는 것도 좀 마음이 쓰렸거든요. 내 마음을 다 알고서는 가서 고백한 나쁜 친구였음에도, 전 걔에게 마음을 썼어요.


그날 이후로 그 친구는 저에게 조금 적대적으로 변했어요. 이전에도 적대적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 사건 이후로 느끼게 된 걸 수도 있고요. 그래도 가끔은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전 제가 잘못한 일이 있고, 그걸로 그 친구가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했어요. 걘 저에게 절대 그 노트를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언젠가는 꼭 보여주겠다 했어요.


한 남자애가 저를 가리키며 말했죠. ‘넌 병신이냐? 쟤 저 노트에 빨간색으로 니 이름 적었어. 걔 니 뒷담도 여러 번 깠어. 멍청하게 속고 있는 게 웃겨서 말해야겠다. 걔 니 싫어해.’ 라고요. 초등학생 입에서 나오기엔 거친 말이었는데, 걔는 그럴만한 얘였으니까 넘어가자고요. 걔는 남자애에게 버럭 악을 지르며 아니라고 했어요. 비명과도 같은 소리였는데, 저는 소음을 싫어하거든요. 조용히 걔에게 노트를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걔는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부들부들 떨었어요. 교실 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어요. 걔는 저를 쳐다보면서 쟤 말은 믿지 마라, 거짓말쟁이다 했어요. 근데 저 남자애도 제법 저랑 친했었거든요. 사실 걔보다 더 친했을 수도 있어요.


걔는 저를 한참 쳐다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그러다 노트를 펼쳐 아주 뒤로 넘겨서 제 이름이 써진 페이지를 펼쳐 보였어요. 새빨간 색으로 써진 저 이름이 내 이름이라는 걸 부정했어요. 너무나도 명확한 내 이름이었는데도요.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았어요. ‘데스노트’라고 적혀 있는 검은색 노트. 걔는 제 이름이 쓰인 페이지를 찢었어요. 남자애는 제 옆에 서서 걔를 내려다보다가 교실을 벗어났어요. 다혈질인 그 남자애가 가끔은 무섭기도 했는데 그땐 조금 더 시끄럽게 해 주길 얼마나 바랐었는지. 차라리 소음으로 소음을 씻어버리고 싶었는데요. 아무도 절 안아주지 않았거든요.


걔는 저더러 네 이름을 적은 게 맞고, 이제는 찢어버렸으니 없는 일이다, 대신 쟤(남자애)의 이름을 적자 했어요. 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지독한 미움을 타본 게 얼마만이었더라. 아마 절친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하더니 교환일기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초등학교 삼 학년의 어느 가을 이후로 처음이었을 거예요. 전 늘 제 잘못을 셈하며 위태롭게 살아왔거든요.


왜였을까. 이유를 생각하려 했어요. 이유는 많았어요. 나를 의심하고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건 끝이 없거든요. 모든 행동이 이유가 되곤 하죠. 전 엄마 품에서 울면서 걔와 같은 반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선생님도 그것을 학교폭력으로 받아들여줬는데 따로 조치를 취하진 못하셨어요. 걔가 저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고, 늘 시기했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알고 있었는데도 저와 걔를 떨어뜨려놓지 않았어요. 멍청한 저만 당해버린 거죠.


전 이후로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어요. 학교폭력을 신고했더니 종례 시간에 학교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며 학교폭력을 한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던 중학교 선생님 이후로는 더더욱이요. 걔가 육 학년 때 저와 같은 반이 되진 않았어요. 대신 한 씨 성을 가진 친구가 같은 반이 되었던 것 같은데요. 아, 이 시절 선생님도 좋진 않았어요. 전 제 친구들을 지켜야 했고, 공부를 이전보다 더 죽어라 했고, 조금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었는데, 선생님은 저와 그 친구를 ‘강파’ ‘한파’로 나누어서 불렀어요. 강한파. 제 성씨가 조금 더 강하다고 웃으셨는데요.


누군가 전학을 오면 ‘반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우리 강파가 받아줄까?’라고 절 불러서 말하는 선생님이셨어요. 강파가 한파보다 더 유순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한파도 그걸 알았고, 제 성씨가 자신의 성씨보다 앞에 불리는 것을 싫어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한강파로 부르는 일은 없었어요. 한 씨 성을 가진 아이는 제게 와서, ‘야 오늘 전학 온 걔, 우리가 받아보려 했는데 별로드라. 너네가 가져.‘ 했어요. 왜 제 성을 걸고 반을 반으로 똑 나눴을까요. 전 그렇게 강하지 않았는데요.


다시 돌아가서 걔 얘기를 마무리해 보자면, 험담으로 팽을 당했어도 여전히 친구가 있었던지, 혹은 내 뒷담을 하며 친구를 만들었던 건지 우르르 다녔던 걔는 결국 험담으로 또 무너졌어요. 아주 혼자 다니는가 싶더니 중학교에 가서는 또 친구를 사귀고 또 혼자 다녔어요. 무엇이 문제인지는 영영 깨닫지 못하겠지요. 전 이젠 걔의 불행을 빌어요. 걔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요. 원래 그런 애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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