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 내 위로 사수가 두 명이 있었는데, 둘 다 서울대 출신이었다. 나는 서울대 출신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똑똑한 사수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 둘은 직장에서 꽤나 친해진 모양으로 보였으며, 다정하기까지 했다. 본인들 밑으로 들어온 나를 정말 잘 챙겨주었고, 내가 헤매고 있는 낌새를 보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헤맬 예정으로 판단되는 순간들을 계산해서 나를 생각해주었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지금도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만, 그 당시 내게 잘해주고 본인들 일까지 잘하는 것을 보고 사실 좀 열등감을 가졌었다. 열등감이라는 표현이 조금 강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 당시 내가 느낀 벽을 생각하면 이 단어를 쓰고 싶긴 하다. 물론, 그 앞에서는 절대 티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놓고 얘기하기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며, 마음만 같아서는 둘 다 국회로 보내고 싶다고. 이 회사에 있을만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며 치켜세웠다. 겸손하기까지 했었던 그들은 나를 보면서도 내가 잘하는게 분명 있다며 배우고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인 점은, 그들과 같아지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아지려해서 같아질 수 없는 사람이란 것도 그렇지만, 그들이 하지 않는 것들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래도 내가 먼저 경험하고 실패해본 경험을 공유하면서 소통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괜스레 뿌듯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그 순간이 그런 순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모두, 자신 만의 영역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루었는지 100%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경험이란 것은 내가 모르는 구성요소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고, 거의 그렇다. 그래서 지난 경험을 복기하며 같은 일을 하더라도, 실수가 나오고, 예외가 생긴다.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지나간 부분들,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분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부분들 까지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다 가르쳐 줬는데, 왜 못하냐'라는 말을 싫어한다. 절대 다 가르칠 수 없다. 내가 잘 못들었을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것이고, 그 때와는 다른 상황일 것이고, 당신에게 당연한 것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잇을 것이니까. 반대로 내게 당연한 것이, 당신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모두 가르칠 수 없으니, 교육이란 것은 두번, 세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여 저런 말을 듣고 사수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 주눅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그러나 너무 길게 움츠려있지는 말기를.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은 영역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영역이 비록 하찮게 보이고, 가난하게 보일지라도, 그 순간만이라도 쟁취해보기를. 그러면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 당신을 바라보는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아직 그 기회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야 삶을 살아가는데 다음 걸음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의 내 일이 조금 하찮아 보일지라도, 아무도 하지않는 일을 하는 것의 의미를 알게되는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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