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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e by Dec 24. 2023

스트레인저 인 뉴욕 day 1

열쇠와 계단 



  까뮈의 글이 스승인 장그르니에 사이에 오간 편지 글에서 수려하게 다듬어진 것은 알려진 이야기죠. 까뮈의 단아한 문체는 장그르니에가 물려준 영향입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간문이 출간되어 있고요. 저는 불문과 학생이었을 때, 교수님이 강의 중 말씀하신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프랑스어로 읽고 또 읽었어요. 


  전공 서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번역문에 드러나지 않은 그르니에의 문체를 알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단어, 문장의 리듬감. 멈추거나 이어지는 문맥 같은 것은 언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예민한 지점이니까요.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그르니에의 문체에 반해 사서 두고두고 지금도 가끔 꺼내 읽는 책입니다. 장그르니에의 글에 '낯선 도시에서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이 여행'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저도 그런 마음으로 뉴욕에 왔어요.


  다소 충동적으로 사흘 만에 떠나온 여정이어서 비행기 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말고사 마치자마자 백장 넘는 답안지 여기까지 들고 올 수 없으니 채점까지만 하고 백장 넘는 시험지 사진 찍어 두었고, 짐 싸는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 대로 몇 개의 물건만 들고 왔습니다. 


  5년 만에 해외 나오니 짐 싸는 것도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뉴욕은 너무너무 추워", "빌딩 사이로 칼바람이야"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막상 짐을 열어보니 두툼한 레이어 옷들, 스카프, 목도리, 3킬로가 넘는 핫팩을 종류별로 챙긴 것 말고는 노트북이랑 충전기 달랑 들고 왔네요. 


  짐도 대충 들고 온 데다 첫날 공항 셔틀 예약을 실수로 오가는 날 표기를 거꾸로 해서 맨해튼까지 어떻게 들어가나 당황스러웠는데 예약자 두 사람이 세관에서 걸려 나오지 못해 겨우 탈 수 있었어요. 이거 기뻐할 일은 아닌데... 


  잘 가나 했는데 40번가 셔틀을 타야 하는 것을 35번가 행을 타서 뉴욕 시내를 돌고 돌았네요. 그것도 어찌 보면 다행? 한 시간 맨해튼 구경을 실컷 했거든요. 관광객 투어 버스 안 타도 되겠어요. 뭔가 문제 상황에서도 긍정적 합리화 자동실행 능력이 살면서 좋아지는 느낌입니다. 




    저도 관광객으로 두세 번 이곳을 들러서 자유의 여신상, 록펠러 센터,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전형적인 뉴욕 관광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딸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곳이고요. 크리스마스 전야의 백화점 거리와 타임 스퀘어, 브로드웨이의 번쩍이는 전광판과 금요일 오후 뉴욕인의 물결... 고개가 꺾일 정도의 고층 건물과 꽉 막힌 거리의 자동차 경적 소리. 


  이것이 뉴욕이라고 하지요. 잠시였지만 조용히 일이나 하며 살아온 제게는 좀 피로했습니다. 시각 정보가 너무 많다고 해야 할까요. 겨우 우버 택시 불러 센트럴 파크 부근 집에 도착하니 Autumn in New York 영화에 나오는 듯한 고즈넉한 동네였습니다.  


  친구 가족들의 배려로 묵게 된 뉴욕 집은 콜럼버스 써클, 어퍼 웨스트 윗쪽에 있어요. 센트럴 파크를 마주 보고 왼쪽 팔 부분입니다. 조금 뉴욕에 익숙해지면 친구가 권한대로 재클린 오나시스 저수지 한 바퀴 아침운동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낡은 키를 돌려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없는 4층으로 짐 올리니 이제 뉴욕 왔다는 실감이 납니다. 


  고요한 이 동네에 마음이 놓이고요. 친구 아들 집인데 그 바쁜 대학 생활 중에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살고 있더라고요. 짐 내려놓고 집에 없는 물건들 좀 살핀 다음 동네 시장 구경 나갔습니다.


  

  

  제 꿈이 그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사는 것이잖아요. 걸어서 걸어서 이 동네는 이렇구나 두리번거리면서 걸었습니다. 걸어서 또 걸어서 홀푸즈, 트레이더죠 다녀오니 저녁이 되었네요. 트레이더죠는 다양한 향신료, 신선한 채소 외에도 즉석요리들을 판매하는데, 10년 전 캘리포니아 살 때 즐겨 먹던 만다린 치킨과 불고기 볶음밥이 있어 반갑더라고요. 


  다시 또 짐 잔뜩 들고 집으로 걸어 걸어 올라 올라오니 해도 하루 해가 졌어요. 부근 레스토랑에서 먹어도 되긴 하지만, 그냥 동네 사람들 속에 끼어서 장 보고, 크리스마스 코스튬 입은 익살스러운 직원들 구경하고, 다른 사람들 크리스마스에 뭐 해 먹나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요. 그런데 집에 오니 아... 배고파요. 간단히 부라타 샐러드 만들고 불고기 볶음밥도 곁들여 맛있게 먹었습니다. 허기가 반찬. 밥투정하는 사람들 다 굶겨야 합니다!


 그 와중에 비행기에 발 올려놓는 받침대, 공기 주입식 목 쿠션, 가방 벨트, 파우치 이런저런 작은 여행용품들을 다*소에서 사서 요긴하게 썼어요. 문풍지 테이프도 붙이니 외풍도 덜하고, 특히 뜨거운 물 넣어 안고 자는 물주머니는 추운 뉴욕에서 가히 혁명적입니다. 짐 조금 더 정리하고 캐모마일 티에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 넣어 올려놓고 노트북 앞에 앉아서 첫날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시차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져 잠들었어요. 새벽에 눈을 떠 창가에 앉아봅니다. 



  

  조용하고 깨끗한 주택가입니다. 조금 걸으면 콜럼비아 대학교가 나오니 학생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해요. 와이파이가 조금 느리고, 이 브런치 글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바일로 보니 사진도 깨어져 올라가네요. 하지만 5층 이하의 고풍스러운 건물, 비상계단의 문양도 세월을 느끼게 하고요. 밤에 깨서 건너편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따뜻해요. 비로소 서울과 일을 잠시 떠나왔음을 실감케 합니다.  



  

  오늘 아침은 친구가 알려준 유명한 베이글 집에서 치즈두부 베이글이랑 모닝커피를 마시고, 브로드웨이 쪽으로 걸어내려가며 크리스마스이브의 뉴욕을 보고 싶어요. 불 밝힌 도시의 아름다움은, 어둠의 이야기조차 이때만은 희망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벌써 발에 물집이 생겼습니다. 한국에서 평소에 얼마나 안 걸어 다녔는지 알려주는 증거. 이제 매일 많이 걸어야 하는데. 드럭스토어에 가서 보호 밴드를 사서라도 걸어야 해요! 


  이 거대한 도시 어딘가에 잠시 내려앉은 이방인에 이 도시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오늘부터 여행해 보겠습니다. 경험한 것은 글로 남겨두려고 해요. 찰나의 기억처럼 사라지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잘 도착했는지 안부를 물어준 분들, 고마워요. 느리게, 안전히, 즐겁게 있다가 돌아갈게요. 


20231223 

뉴욕에서 note 


thanks to sw&jh


#뉴욕 #noteby #여행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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