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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Dec 31. 2020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시죠?

올라퍼 엘리아슨이 물었다.



캄캄한 방구석에 잠옷을 입고 널브러졌다. 드디어 내 시간이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하나 골라 마음 편히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재미없으면 바로 다른 걸로 갈아탈 참이었으니까. 모든 일이 끝나고 긴장을 풀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

그런데 어느 동그란 눈의 안경 쓴 남자가 갑자기 화면 밖 내게 말을 걸었다.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그의 말 몇 마디 몇 마디가 가슴에 콕콕 박혀 40분의 상영 시간 내내 실컷 혼쭐이 난 기분이었다.

갑자기 넷플릭스가 가만히 있던 나를 한 방 먹인다고?

그런 사람이 있다. 너무 솔직해서 상처를 주기는 하는데, 미워할 수 없어 다시 돌아가고픈, 보고픈 그런 사람.

그날 밤 이후로 나는 그 에피소드를 세 번이나 다시 돌려봤다.

그저 내 무의식 깊숙이까지 집어넣고 싶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태도를 내 안에 그대로 욱여넣어서라도 그 아티스트를 닮고 싶었다.



"

이 에피소드를 왜 보셨나요?

봐주셔서 저야 무척 기쁘죠.

하지만 여러분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었길 바랍니다.

무엇을 얻으셨나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시죠?

"


출처: 넷플릭스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 시리즈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시즌2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

디자이너 올라퍼 엘리아슨이다.




지난 10월이었다. 15개월 간의 호주 생활을 뒤로하고, 드디어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창업이라는 큰 꿈을 품은 채로 한창 열정이 넘쳐흐르던 때였다. 마치 추운 겨울날 붕어빵을 사먹기 위해 가슴속 깊이 넣어놓은 3천 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만 알고 있던 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이제 사업으로 만들까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참이었다.


창업은 그냥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내 아이디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바꿀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명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곧 다가올 나의 장밋빛 인생이 그려졌고, 나 마크 주커버그처럼 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까지.

지금 돌이켜보면 쥐구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지, 암.


 


이제껏 나는 '왜'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눈 앞에 놓인 질문들의 정답이 중요했고, 그 정답을 어떻게 남의 눈에 좋게 보이게 만들까 신경 썼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에 게으름을 느꼈던 탓도 있고, 본래 성질이 급해, 우선 진도부터 빼자는 식이었다. 문제가 주어지면 정답만 열심히 찾고 100점 맞는 게 목표였지,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는 것? 나참, 고리타분한 이야기 하시네.



출처: 넷플릭스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그렇게 나는 '왜'보다는 어떻게 이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는지 '어떻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자신의 팀원들이 '어떻게'에 집착하는 동안 본인은 '왜'를 다시 찾는다고 말했다. 모든 결정의 원동력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이며, '어떻게'에 집착하다 보면, 그 일을 왜 하는지 잊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이미 대단한 아이디어는 갖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타겟으로 하며, 마케팅은 저렇게 하고, 디자인은 이렇게 하자, 블라블라... 실컷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고, 결국은 다시 원점이었다.



그래서 왜?  



우선은 내가 대체 이 아이디어를 애초에 왜 생각한 것인지, 이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도대체 무엇인지를 다시 짚어 보았다. 생각이 잘 안 풀릴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앱스트랙트> 올라퍼 엘리아슨 에피소드를 배경에 틀어 놓았다. 그만큼 나의 Why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고민에 휩싸인 또다른 2주가 흘렀고, '이 상황에서, 이런 사람들의, 이런 문제가 있구나!'라는 정답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Why를 찾은 그 날, 결국 몸져누웠다.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Why', 너 하나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였어?



내 아이디어의 Why는 무엇인지,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던 그 당시의 노트.



그 후로는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문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그 눈빛을 기억한다. 화면을 뚫고 나와 내 뇌리에 콱 박혀 버린 그 눈빛과 말.

어쩌면 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시끄럽게 돌아가 보이는 것도, 우리가 문제의 핵심은 건들지도 않은 채, 그 언저리만 비잉 비잉 돌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문제를 찾는 과정은 귀찮다. 매우 번거롭다. 아니,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굳이 돌아가야해? 싶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렵기도 무섭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알면서도 그대로 둔다.




출처: The Art Newspaper



"

뭔가를 볼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우리의 주변 환경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노력하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해요.

"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또다시 실속 없는 어느 언저리의 장밋빛 강물에서 신난다고 홀로 헤엄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놓치는 그 'Why'는 무엇인지.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올리퍼 엘리아슨이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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