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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kjaya Aug 11. 2015

방글라데시에서의 흔한 하루.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가벼웠던 하루였다.

아침에 유독 몸이 개운했다.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 알람을 끄고, 가벼운 몸을 일으켜 준비를 했다.

어제와 그제 시골 왔다 갔다 하면  많이 자서 그런가, 했다. 역시 잠은 질보다 양인가, 하며.


개운한 몸으로 릭샤를 한 번 갈아타고 꽤 먼 길을 가는데, 평소 한 번도 안 막히던 길이 엄청 막힌다. 

뭔가 변수가 생긴 건가. 특정 장소에 공사를 시작했다거나. 그래서 좀 늦었다. 


버나니 에가로에 간다고 출발 전에 말했는데 이 릭샤 아저씨가 거의 다 와서는 길 건너 목적지까진 못 간단다. 

주변 사람들이 와서 뭐라고 하는데 대충 들으니 이 사람은 길 건너에서 릭샤 끌 허가증이 없다나. 

자기가 갈 수 있다며 옆에 있던 목소리 좋은 덩치 큰 아저씨가 자기 릭샤에 타란다.

(이 이후 난 덩치 크고 머리 흰 릭샤 아저씨만 보면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겁이 난다.)


아저씨 목소리 좋네. 늦었는데 이 아저씨가 바로 태워줘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벵골어 학원으로 간다. 

도착해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합당한 액수를 주고 가려는데, 이 아저씨가 돈이 적다고 내가 준 돈의 무려 2.5배를 내 놓으란다. 


벵골어 학원 대문이 잠겨있는데 열 줄 모르겠다. 

늘 있던 문지기도 오늘따라 안 보인다. 

잠긴 게 아니라 안쪽 걸쇠가 걸려있어서 손 넣어 풀면 되는 거였는데, 당황하니까 문을 열 줄도 모르겠다. 

다른 곳으로 숨을 곳도 없이, 꼼짝없이 문 앞에 갇혀서 릭샤왈라가 돈 더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걸 듣고 서 있어야 했다.


매우 화가 났다. 

건너편 게스트하우스 문지기 아저씨가 보고 있다. 

'저, 저 릭샤왈라 잘못 만나 저 고생이네.' 하며 안됐다 여기는 표정이다. 

결국 그 아저씨한테 "얼마 줘야 돼요? 아저씨 좀 말해봐요~!" 하고 말해,   2.5배에서 2배로 협상하여 주기로 한다. 


돈을 바닥에 던지고는 "야!" 하고 소리 지르고 가고 싶었지만, 그 아저씨는 덩치가 큰 남자라 내 신변이 위험하다. 

차분하게 돈을 건네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러지 좀 마요. " 하고 학원에 들어갔다.


언제나 내게 뜨거운 감자, 릭샤.


매우 흥분한 상태. 

선생님에게 자초지종 얘기를 하니 내가 준 20 타카보다 좀 더 높은 30 타카가 적정가일 수 있단다. 

그 말에 내가 좀 적게 줬나? 이 동네는 더 비싼가, 생각하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잠시 선생님이 책을 가지러 간 사이에 기도를 했다. 

내 마음을 안정시켜 달라고. 그 릭샤왈라, 앞으로 그러지 않게 해 달라고. 

한편으론 불쌍한 사람일 테니 도와 주시라고. 

그러자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일대일 수업시간, 머리가 팽팽 도는 벵골어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새 책을 시작해서 단어가 무지 어렵다. 

공교롭게도 본문은 외국인이 방글라데시에 와서 너무 좋고, 특히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방금 전 릭샤왈라와의 일이 생각나 민망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까 일이 스트레스로 남지 않고, 조용히, 빠르게 마음의 고통이 사라져간다.


혼자 열심히 읽고 말해서 목이 아파 많이 힘들  때쯤 수업이 끝난다. 

이거, 이 나라 떠나면 아무  소용없는 언어일 텐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나 싶다가도, 이 기회 아니면 평생 언제 또 이렇게 이 말을 배워 보겠냐는 생각에 다시금 마음을 다진다. 


학원 교재나 수업도 마음에 든다. 

영어를 이렇게 체계적으로 다시 알파벳부터 배우면 잘 하지 싶다. 

벵골어 배운 순간부터 내 머릿속 지우개가 영어를 다 지워버렸다. 

단순한 단어도 생각이 안 난다. "괜찮아?" 이 정도 말도 생각 안 난다.

대신 벵골어만 먼저 생각나서 영어 벙어리가 됐다. 

다음 달까지 벵골어 수업 듣고 그 다음부턴 다시 영어를 살려봐야지.


긴 휴가와 출장 끝에 오랜만에 사무실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한다. 보람차다.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늘 가던 재래시장 과일가게에 들른다. 

망고도 먹고 싶고, 파인애플도 먹고 싶고, 사과도 맛나보이고 오렌지도 예전부터 먹고 싶었다. 

내가 말도 안 했는데 사과를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아저씨가 사과 사가라며 넣어준다. 눈치 백 단. 


네 가지나 샀는데 석류까지 권한다. 아, 무조건 다 권하는데 낚인 거구나. 

오렌지는 남아공에서, 사과는 브라질에서 왔단다. 망고 파인애플은 물으나 마나 국산. 


조금씩 다 사서는 잔뜩 들고 귀가한다.


과일을 들고 릭샤 타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엔 어떤 글을 쓸까 구상해본다. 

방글라데시 과일에 대해 써 볼까, 역시 물가 높은 방글라데시에서 과일을 많이 먹어야 조금이라도 본전을 찾지 싶다. 

이 내용을 써야겠다. 그동안 이곳에서 먹은 맛난 과일들 맛 평가와 함께. 


벵골어에 대해서도 쓰려고 예전부터 구상 중인데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래, 그 문장으로 제목을 정하고 그걸 도입으로 해서 글을 풀어나가 봐야지. 

오늘 밤에 써봐야겠다. (결심하지만 끝내 오늘 안에는 쓰지 못하고 잠들게 된다.)


파인애플 참 맛있다. 새콤 달콤. 

망고는 안 먹으면 먹고 싶은데 막상 먹으면 내 입에 착착 붙는 맛은 아니다. 

뭉글뭉글한 식감과 가끔 느껴지는 약간 덜 익은 신맛, 그리고 조금씩 느껴지는 섬유질에 반감이 든다. 

내일 다 갈아서 망고주스 만들어야지. 

사과는 아침이니까, 내일 아침에 밥 먹고 사과도 한 개 깎아달라고 해서 먹고 가야지.


내일은 한국 야채 가게에서 주문한 것들 받아오는 날. 

심부름하는 애에게 주려고 미리, 굳이 벵골어로 안 써도 되는데 일일이 사전 찾아가며 벵골어로 주문 목록을 써본다. 

혼자 뿌듯해한다. 


힘든 하루였을 수도 있는데 신기하게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다. 

좋은 하루였다. 

안녕. 

내일 하루를 만나러 꿈나라로 가야겠다. 끝.


+

8월 18일 내용 추가.

이 글을 쓴 날이 딱 일주일 전인데, 신기하게도 이 날 이후 릭샤왈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던 구간을 매일 같은 릭샤왈라를 만나 스트레스 전혀 없이 다니고 있다. 

한 번 탔던 릭샤를 다시 타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인데, 내가 매일 같은 시간에 멀리 가는 걸 알고 10대로 보이는 어린 릭샤왈라가 늘 같은 자리에서 날 기다렸다 태우고 가는 것이다. 

내 전용 릭샤 기사처럼.

이 아이는 운전도 잘 하고, 돈을 더 내놓으라고 억지 부리지도 않고, 목적지를 알고 있으니 길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나의 기도가 이루어진 거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요즘 아침마다 마음이 참 편하다.


좋은 하루였다. 이 나라에 정이 들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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