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새 학기를 맞는 학생처럼 정리정돈된 상태로 시작해야할 것 같았다. 봄맞이 대청소의 시작으로 옷장 정리를 했다. ‘이번엔 눈 딱 감고 싹 버릴거야! 정말이야!!’ 단단히 결심하고 시작했다. ‘옷장 안에 있던 옷을 꺼낸다, 버릴 옷은 버리고 입을 옷만 다시 접어서 넣는다’, 그 간단해보이는 일이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옷장 안에서 버릴 옷을 꺼내는 것이 아니고 옷에 담긴 사연들을 꺼내느라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약혼식 때 입었던 한복, 벼르고 별렀다가 첫 월급기념으로 샀던 고급 코트등등 옷장 속에는 옷보다 나의 역사가 더 가득하다. ‘이 옷은 조금 낡아졌으니, 청소할 때 막 입고 버려야겠다’, ‘이 옷은 집에서 편하게 입지 뭐...’, ‘이 옷은 언젠가 재봉을 배워서 뭔가 만들면 좋은 옷감이야...’라며 다시 접어 넣고 있다. 그 옷을 사고 싶어 고민하며 느꼈던 설레임, 그 옷을 갖게 되었을 때의 기쁨, 그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의 만족감까지...기억 하나하나에 의미을 담다보니 버릴 수 있는 옷이 없었다. 어떤 명목을 대서라도 버리지 않으려는 나를 본다.
‘베어버리려 마음먹으면 잡초 아닌 것이 없고, 품으려 마음먹으면 꽃 아닌게 없다’ 어디선가 본 글귀까지 떠오르면서, 나의 미련스러움을 돕고 있었다.
‘이건 아이들하고 갔던 첫 여행에서 입었던 가족 티셔츠인데...그때 보았던 석양이 참 좋았었지...’, ‘이 옷을 입을 때 나는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이었지...그땐 왜 몰랐을까...’하다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버렸다. 몽땅 꺼냈다가 다시 접어 다시 제자리에 넣는 고장난 로봇으로 시간만 보낼 수가 없어서, 자구책으로 옷더미를 세 뭉텅이-진짜 버릴 옷, 애매한 옷, 안 버리고 싶은 옷-로 나누었다. 최종적으로 진짜 버릴 옷만 박스에 넣고 나머지는 내년에 버리자고 나름의 타협을 해본다.
의류수거함에 내 손으로 넣고 싶지 않아서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내가 박스에서 꺼내서 남편에게 건네주면 남편이 수거함에 넣는다. 오랫만에 제법 박자가 잘 맞는 듯했다. 몇몇 옷은 남편 손에 건네는 순간 잠시 머뭇거리며, ‘아...내년에 버릴까...’하게 되는 옷도 있었다. 의류 수거함은 한번 넣으면 다시 꺼낼 수 없도록 자물쇠로 꽁꽁 채워져 있었다. 미련까지 모두 수거함에 넣어버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남편 표정이 심상치 않다.
‘왜 그래?’ 물으니, ‘내가 사준 옷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어?!’한다. 버린 옷 중 하나가 남편이 백화점에서 골라준 옷이었다. 남편은 백화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30년 넘게 살면서 딱 한번 같이 가서 골라준 생일 선물이었다. 사실 그때, 쇼핑에 지쳐서 '그 옷 괜찮다. 그냥 사라'하길래,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마지못해 샀던 옷이었다. 자주 입지는 않게 되어서 늘 처박혀있던 옷이었고, 유행이 지나서 입을 수도 없어졌다.남편은 자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골라준 옷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신도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낀 것일까...내 생일인데 내가 남편 눈치를 보면서 선물을 골라야하는 그날의 분위기가 떠올라서 미련없이 버렸을까...
‘이 옷을 기억하고 있네...나도 버리면서 아깝긴 했어...’라고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옷 대부분이 당신이 사준 옷인데, 그럼 옷을 하나도 버릴 수가 없쟈나?!’라고 쏘아붙였다. 이틀간 이방 저방 다니면서 옷 정리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기도 했고, 내 안에 있던 '어쩌다 한번 백화점에서 옷을 사주면서 어찌나 눈치를 줬는지...참, 치사했었지...왜 그 옷을 자주 안입느냐며 어찌나 생색을 냈었는지...'하는 마음으로 보란듯이 버렸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였기도 했을것이다.
티셔츠 쪼가리는 '언젠가 작업복으로라도 쓰겠다'며 도루 옷장 안에 넣으면서, 남편이 골라준 유일한 외투를 아낌없이 버린 행동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제 더 이상 남편눈치보며 사는 인생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소망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부모님의 재산과 남편의 재력이 두둑한 K라는 언니는 맥시멀리스트다. 뭐든지 마음에 들면 같은 것을 서너개씩 산다. 그런데 그 언니의 남편은 미니멀리스트다.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한 깔끔하게 살고 싶어한다. 남편에게 숨이 막힌 어느 날, 언니는 바로 앞집을 사버렸다. 1501호는 남편 취향대로, 1502호는 언니의 취향대로 꾸몄다. 식사는 1502호에서, 잠은 1501호에서...둘은 다투지 않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준다고 한다.
오늘따라 나도 앞집을 사고 싶어진다. 1001호에는 사연 가득한 옷들을 옷장 가득 넣어둔 채로, 1002호에서 그 계절에 입을 옷만 걸어두고 깔끔하게 살고 싶다. 1001호에서 ‘아...옷 정리해야되는데...’하는 스트레스가 생기면 얼른 1002호로 도망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