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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아지트 Mar 07. 2024

선 긋기부터 다시 시작!

    

내 인생에서 가장 열등감을 많이 느꼈던 분야가 그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 못 그리는 것에 대해 열등감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나는 정체성을 찾는 사춘기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입시미술을 했었다. 학교에 있으면 수학을 전교에서 제일 잘 하는 우등생인데, 화실에 가면 나는 뎃생을 가장 못 그리는 열등생이었다. 내 인생의 암흑기는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림은 사실 내 안에 언어화시키지 못했던 것들을 표현하는 '언어'여야 한다. 낙서든 만화든 그저 끄적거림이든, 내 수준에 맞게 내 마음을 표현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잘 그리면 더 좋지만, 내가 표현해내고 싶은 것을 표현했다면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입시미술은 ‘잘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임해야한다.  즐거움과 연결되기 어렵다. 내 그림에 대해, 내 '표현'에 대해 나쁜 평가받는 일을 지속하며, 사춘기 시절동안  안에는 열등감이 자리잡았다. 그냥 공부를 했다면 그정도로 나쁜 평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게다. 이제라도 그녀석을 넘어서고 싶어, 나는 다시 이젤 앞에 앉았다.     




평생교육원에 연필 초상화반에 들어갔다. 유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또 포기하게 될까봐, 연필로만 그리기를 신청했다. 그림그리는 일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취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십년만에 다시 4B연필을 잡았다. 12명 중에 반 정도가 은퇴 후 소일거리를 찾아오신 분들이었고,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들으며 선 긋기를 하다보니, 중학교때 처음 화실에 갔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분위기였다. 학생들이 이젤을 앞에 두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말없이 각자의 그림을 그렸다. 그날에도 라디오에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사’라는 문법을 타고 무의식 속에 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그림그리기를 시간낭비로 생각했었고, 한달 내내 선 긋기만 시키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었다. 그때의 그 ‘화’가, 지금 고스란히 종이위에 담긴다. ‘나도 모르게’ 엄청난 필압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 미술치료에서도 필압은 그 내담자의 공격성을 볼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내가 나의 선긋기를 보면서 내가 내 필압에 놀랐다.


‘그때 너...정말 화가 많이 났었지...수학문제를 풀어야 할 그 시간에,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선긋기작업을 몇 시간씩하면서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었지...’, ‘그 화를 풀어내지 못하고 입을 닫고 마음을 닫았었지...’하며 그 시절의 나를 만나준다. 그리고 감정에 대한 타당화를 해준다.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원래 그림을 좋아했다면,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서라도 입시 미술의 빡빡함을 견딜 수 있었겠지...하지만 너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고, 미술 때문에 수학을 포기해야하는 그 시간이 원망스러웠을거야...‘     




한 시간동안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선을 긋는 작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다른 분들의 그림을 보았다. 은퇴하신 후 9학기째 그림을 배우러 오신다는 어르신의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사진보다 더 실물같이 초상화를 그리신다. 그분이 나에게  ‘선 긋기가 힘들지요? 그런데 나도 거기서부터 시작했다오...’하신다. 나의 거친 선긋기 소리에서 나의 마음을 읽으신 모양이다. 난생처음 그림을 배웠는데 4년 반동안 꾸준히 매일 3시간씩 그렸다고 하셨다. ‘이렇게 잘 그리시는데도 왜 계속 배우시느냐’고 물으니, ‘아직도 선생님의 지적이 필요하다오’하신다. 강사보다 족히 30세는 많아보이시는데, 배우시려는 그분의 겸손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어쩌면 선 긋기를 거칠게 하는 내 모습 이면에는, ‘나, 서울대 미대 준비했었던 사람'이라는 거만함이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 시절의 내가 느꼈던, ‘또 내가 제일 못했네...’하는 열등감을 다시 느끼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두 번째 다른 선긋기를 할 때는 첫 시간과는 달랐다. 나는 차분하고 정성스럽게 선긋기를 했다. 강사님이 다가와서 ‘이제 좀 진정이 되셨군요...’라고 하신다. 그분이 보시기에도 1교시에 내 선긋기는 시건방진 작업이었던 것이다. 강사님은 '선 긋기만 하다가 그만 두시는 분이 많았어요'라고 하신다. 내가 다음 주부터 안 나올 거라고 예상하시는 눈치다.     


그러나 나는 다음주에 꼭 갈거다. 단 한번도 그림을 배운 적 없는 사람처럼,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그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골프도 아예 처음 배우는 사람 가르치는게 쉽다고들 한다. 그림 그리는 내내 '그 시절의 나'가 튀어나와 툴툴거릴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잘 달래고 싶다. 잘 달래어서 '우리반에서  스누피 제일 잘 그린다는 자부심이 있던 나', '그림에 그리 열등감없던 나'로 돌려놓고 싶다.


그 시절에는 오직  '잘 그려야만 한다'였다. 그러나 이제는 '잘 그리고 싶다'. 그 어르신처럼 겸손하게 배우려는 자세를 장착한다면 언젠가 나도 그림에 대한 열등감을 벗어나, 내 마음 속 이야기를 마음껏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그날을 꿈꾸며 선긋기부터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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