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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왕 Dec 14. 2019

그러니까 삶이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01. 우에다 신이치로

연말이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 중 이룬 것들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배에는 '왕'자가 새겨있었어야 하고 옆에선 하하호호 같이 웃는 연인이 있어야 하고, 통장엔 성공적인 투자로 보기만 해도 흐뭇한 액수가 찍혀있어야 한다. 

하지만 배는 잔뜩 독이 오른 복어처럼 더 부풀어져 있고 옆에는 아무도 없으며, 통장엔 연초보다 줄어든 잔고가 반기고 있다. 

그리 놀랍진 않다. 매년마다 크고 작은 계획을 세우지만 늘 연말이 되면 반성하고 내년에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그리고 그 반성과 후회로 맞이 하는 연말이 31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 정도면 일관성 있는 나에게 참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나의 올해를 반성하던 중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지난해부터 주위 칭찬이 자자했던 영화였고, 꼭 봐야지 계획했던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를 보겠다던 계획을 지키는데도 2년이 걸렸다.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도 한수 접고 갈 무려 37분간의 원테이크 신으로 시작된다.

얼핏 좀비 호러 영화라고 생각되는 영화는 장작 37분간 원테이크로 진행된다. 

길고 긴 37분간의 롱테이크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서  '왜 이런 영화를 추천한 거지'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엉성한 이음새와 사고가 아닐까 의심되는 장면들이 부자연스럽게 섞여있다.  '이렇게 일본 영화가 침몰하는구나'란 생각과 혹시나 '내가 이 영화의 깊은 내면을 다 들여다보지 못할 정도로 통찰력이 부족했나'란 생각이 들 때쯤 뒤통수를 크게 후려칠 한방을 서서히 보여준다. 


37분간의 1차 상영을 끝내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영화는 갑자기 한 달 전 이 영화가 기획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능프로그램의 재연영상을 찍는 감독에게 한 제작자가 '오직 원테이크'로만 이루어진 좀비 영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지 제안한다.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감독은 제작자의 제안을 수락하고 '오직 원테이크'로만 구성된 영화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배우를 섭외하고 대본을 구성하고 동선을 어떻게 이어갈지 리허설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부터 불안한(?)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설사병을 앓고 있는 배우와 술독에 빠져 사는 배우, 초예민한 배우 등 섭외된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지만 조악하기 그지없는 리허설 현장도 과연 이 상태로 원테이크로 찍을 수 있을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어찌 됐든 마침내 영화 촬영 날이 다가온다. 만발의 준비(?)를 한 상태에서 슛이 들어가기 몇 시간 전 배우 몇 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급하게 배우 출신이던 감독의 와이프가 현장에서 섭외된다. 원테이크이자 방송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촬영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비상상황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촬영이 시작된다. 


초반 몇 분은 정해진 동선대로 영화가 흘러가는 듯하다. 그러나 결국 사고가 곳곳에서 터지고 만다. 좀비 역을 하기로 한 배우는 술에 만취한 채 인사불성인 상태로 등장하고 설사병을 앓고 있는 배우 역시 설사병이 도지고 만다. 촬영을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위기 속에서도 감독은 절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는 신념 하에 촬영을 이어간다. 


그렇게 영화는 초반 37분간의 과정이 왜 엉성하고 이상했는지를 카메라 뒤에서 고군분투하는 제작진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어찌 됐건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고 엉성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영화 한 편이 완성된다. 



본격 촬영을 시작하기에 앞서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은 수많은 리허설을 진행하며 촬영을 준비했다. 하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튀어나온 변수들로 제작진들은 죽을 맛이지만 그걸 보고 있는 관객들에겐 유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NG로 보이는 컷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면 의미와 사연이 있었다. 영화를 구성하는 장면마다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원테이크 촬영이었지만 카메라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비록 엉성하더라도 이 현장 자체를 의미 있게 바라보는 누군가가 존재했고 동경하는 누군가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의 응원 속에서 감독과 배우들은 비록 우스울지는 몰라도 끝까지 카메라를 돌릴 수 있었다. 

예측할 수 없던 변수 속에서 결국엔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조금은 엉성하지만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영화는 참신했고 기발했으며 따뜻했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를 연말에 본 게 너무 잘한 일이다.

적어도 나의 올해가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에 대한 좋은 이유를 만들어줬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수많은 변수들 속에서 어긋나고 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올해를 연초로 돌려 처음부터 다시 갈 수는 없다. 

카메라가 돌기 시작한 이상 끝까지 찍어야 하는 원테이크 촬영처럼 삶 역시도 원테이크다.

NG가 났다고 해서 다시 무를 수도 없고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잘못되고 틀어지더라도 꾸역꾸역 흘러갔던 37분 간의 촬영처럼 우리 삶도 실수와 변수 속에서 꾸역꾸역 흘러간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그만두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카메라를 돌릴 수 있는 이유는 주위에 있는 '누군가'들 덕분일 것이다.

그 '누군가'는 형편없어 보이는 나의 삶을 동경하고 위로하는 사람일 수 있고, 혹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싫어하는 사람일 수 있다. 어찌 됐든 그들 덕분에 삶이란 영화는 다채로워지고 의미 있어진다. 


영화에도 다양한 엔딩이 있다. 흔히 보는 해피엔딩이 있다면,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새드 엔딩도 존재한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열린 결말로 끝날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그 영화 안팎으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와 고군분투가 녹아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해'라는 어쭙잖은 위로를 하는 게 아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이라도, 실패하고 무너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영화를 끝까지 완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영화 제작진처럼 우리 삶도 나아가기 위해서 힘겹게 고군분투하는 '내'가 있고 주변의 누군가가 있다.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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