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공중보건 혹은 의학 관련 전문적인 학위가 없다. 즉, 비전공자로 국제보건과 아프리카를 연결시킨 아프리카 내 UN에서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Family Planning/Gender Programme and M&E 전문가로 일하고자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왜 Public Health와 International Development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1. 바야흐로,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18살 한국으로 치면 고2의 나이였지만 미국에서 High School를 다닌 관계로 freedom 안에서 학업을 이어나갔고 방학 때마다 road trip journey를 통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바로 Manhattan in New York!
원래 New York의 이미지는 럭셔리하고 모든 뉴요커들이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적이고 상업적이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당시 어렸던 내 눈과 마음을 흘린 곳은 바로 New York 한가운데 사회적으로 보장받기 어려운 계층들이 아파도 병원에 갈 여력이 안 되어 치료 시기를 놓쳐 안타깝게 병을 키워가는 것 그리고 대부분 이런 인구 계층들은 이민자, 난민, 장애인, 실업자들이었고 대부분이 유색 인종의 청년들 혹은 노동인구층이었다. 나는 New York UN본부를 지나 얼마 걸리지 않는 Harlem Street을 지나며 또 아이러니한 New York 시내를 느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New York 한가운데서 눈에 쉽게 보였고, 이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이런 사회적 현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친구들, 케냐, 가나, 짐바브웨 이민자, 멕시코, 엘살바도르 등 히스패닉 계통의 친구들과도 같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서 나는 더 개발도상국에 관해서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당시 미국 역사상 첫 아프리카계 혼혈 대통령인 Barack Obama 대통령의 당선 영향으로 아프리카 케냐에 대해서도 더욱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 나는 학부 때 중국지역학을 전공하면서, 중국어를 더 현장에서 깊게 배우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중국 산둥 성 곡부시에서 교환학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012년 8월 말, 나는 산둥 성 Jinan 공항에 도착하였고, 차로 편도 4-5시간 만에 내가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지냈던 학교인 Qufu Normal University에 도착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적응을 다 했을 무렵, 나는 갑작스러운 복통 호소에 ambulance에 실려갔다. 태어나서 한 번도 Ambulance에 실려간 적 없는 나는 타국에서 가족들도 없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당시 태국, 베트남 친구가 옆에서 있어줬는데, 난생처음 가본 중국 시골 병원은 너무나도 내 기준 밑이었다.
의료 인력들은 병원 내에서 흡연을 하였고, 하루에 환자가 평균 3-4명 목숨을 잃어서 장례식장이 너무 바빴고, 병원 환자 복은 없고, 병원 밥도 없다. 또 병실 내 화장실이 없고, 복도에 공용 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없었다.
내가 밤에 실려왔는데에도, 검사 후에는 중국 내 국제 정치 이슈로 인해 외국인인 내게 병상 부족 탓을 하며 복도에 1인용 침대와 함께 내팽개쳐졌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병명은 다름 아닌 충수돌기염, 맹장염. 다행히 터지기 직전이어서 복막염까지 가지 않았지만, 내가 직접적으로 의료 서비스 취약점을 2주간 타국 입원 및 수술로 경험했기 때문에 취약 지역 및 계층들의 의료 서비스 향상을 위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 학부 졸업 후 바로 나는 KOICA 월드프렌즈 NGO 봉사단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보건 NGO인 아프리카 미래재단 잠비아 지부에 1년 간 파견을 갔다. 보건학/의학 비전공자로써 내가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보건 관련 행정 및 회계, 사업 관리 지원이었다.
그중 바로 내가 직접적으로 국제보건에 몸 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건네어 준 사건이 2가지가 있다.
1) 병원 Reception Night Shift로 일하는 동료는 부인이 임신 중이라며 두 번째 아기가 곧 나올 것이라며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동료의 부인이 출산 준비 중 수혈이 필요했는데, 여건이 되지 않아 예방 없이 바로 출산에 들어갔다. 결국 출산 도중 과다 출혈로 산모는 하늘나라로 갔고 아기만 건강하게 태어났다.
2) 같이 일한 동료 중 제일 연장자였던 현장직 동료는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길가에 쓰러진 채로 행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동료는 내가 일하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왔으나, 여력이 되지 않아, 잠비아에서 제일 큰 병원인 University Teaching Hospital로 이송되었다. 2-3주간 coma 상태로 있다가, 슬프게도 하늘나라로 갔다.
이러한 나의 경험들로 인해 나는 결국 아프리카에서 국제보건 및 국제개발 일을 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