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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May 22. 2020

지구가 납빛 구슬이었을 때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증인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 자신 밖에는요. 한때 외롭고 거대한 행성이었던 이곳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수억년의 침묵같은 납빛의 구슬이었어요. 버려진 그 구슬은 그렇게도 억겁의 적막속에서 그 어떤 정겨운 피조물도, 가늠할만한 그 어떤 형상도 없이 뜨겁게, 그리고 창백하게, 아주 탁한 색으로 굳어갔어요.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 동안요. 하지만 그때는 바람같이 스치는 외부의 시간도 없었고, 의식도 없었으니 그것은 어떤 서글픈 잠 같았답니다. 이 얼음과, 불과, 액체로 구성된 구슬은 어쩌면 시간 그 자체였어요.


그 어떤 것도 침투할 수 없는 자기완결적인 구슬. 이 구슬의 고독에 비할만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었어요. 광활한 우주 외에는 말이에요. 이렇게 영원이 지나갑니다. 구슬을 채우던 불은 점차 꺼져갔고 구슬을 둘러싼 냉기는 식어갔지요. 어느 순간에는 구슬 안의 무언가가 눈을 뜨게 됩니다. 그것이 처음 느낀 것은 무엇일까요? -고통이었답니다. 쪼개지는 고통, 물에 잠겨버린 고통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 그 지독한 어둠 속에서 끝나지 않아 형벌같은 <외로움>을 견뎌왔다는, 그 최초의 자각이었죠. 혹은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요?


고통은 물론 기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원이 남긴 상흔, <기억>은 구슬을 떨게 했습니다. 그러자 우주를 울릴 만큼 거대한 천둥소리가 퍼져나왔어요. 고통이 담긴 기억으로, 첫 혈관이 -물론 말라 있었고 그 무엇도 흐르지 않았지만- 갈라져 나왔던 것입니다. 시간과 납빛의 구는 그렇게 비명처럼 분리되었어요. 매끄럽기만 하던 구의 표면에 태초의 상흔, 혈관 자국, 균열이 나 버린 것이에요. 첫 형상이었어요.


오로지 자신을 비춰보기 위해, 구슬은 거울을 필요로 했어요. 눌려있던 냉기는 새파란 빙하가 되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녹아 흘러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태초의 물이 핏줄을 채우며 흐르기 시작했어요. 그때였어요. 처음으로 <형상>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었어요. 그 출렁이는 고요한 물결. 하지만 그 모습은 사실 자신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정말이지 얼마나 달랐는지! 그러자 비탄과 사랑과 분노가 형상을 무너져 내리게 했어요. 그러자 형상의 몸부림에 깨어난 빙하수 역시 진노하며 일어섰어요.


그들은 그토록 오랜 시간 싸웠어요. 두려운 거인들의 싸움이었어요. 오로지 잊기 위한,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싸움. 대지의 틈은 검붉은 용암을 토했고, 심연같은 바다는 소용돌이치며 덮쳐왔어요. 극지에는 싸늘한 분노가 끝도 없는 설원으로 쌓여갔죠. 인간이 감히 가늠할 수도,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시간 동안. 그리고 그들이 너무도 지쳤을 때, 그들은 드디어 서로를 껴안고 무너졌어요. 드디어 하나가 되었던 걸까요? 물론 아니었습니다. 땅은 땅이고, 물은 물이지요. 태초에 생긴 상처는 결코 봉합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시 무無 속으로 녹아버리기 전 까지는요.


그런데 그들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 고통스러운 다름 위로 생명이 퍼져 나갔습니다. 


절벽 위에 올라서서, 평원 위로, 깎아지른 산등성이 위로 불타는 노란 꽃들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바다는 땅을 동경하듯 저 멀리서 반짝입니다. 땅은 바다로 향하려는 듯 깎아지르며 무너져요. 모든 것이 너무도, 너무도 다릅니다. 지구 위에 오로지 단 하나밖에 없는 어떤 꽃은 쓸쓸히 시들어 갑니다, 더없이 외딴 곳에서. 그 향기는 증인입니다. 이 모든 것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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