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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Feb 06. 2021

언제였던가. 나는 길을 잃었다. 그리고 깊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었다. 포악한 늑대의 흉포한 울음소리가 거대한 숲 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였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현자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은.

“저기, 여자가 뭔지 알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현자는 길고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내 뒤로 난 길을 걸어가면 된다네.”

그는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 가파른 계곡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가리켰다.


나는 기꺼이 그 길을 걸어올랐다. 참으로 깎아지른 길이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었고, 가끔 뒤를 돌아다볼 때에는 오싹하게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드디어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거대한 신전이 하나 서 있었다.


하늘에 닿은 그 신전은 얼마나 거대했는가.

아름답게 늘어선 열주들이 태양빛 아래 흰색 이빨처럼 빛났다. 모든 곳에서 광채가 났다. 완벽하군! 정말 기꺼운 풍경이야. 나는 감탄했다. 하지만 그래서, <여자>는 어디 있다는 거야? 이렇게 땀 흘리며 걸어왔는데, 깨진 무릎에서는 붉은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그러니 전채요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을 말해 달라고, 친구. 돌이켜보건대, 나는 참을성이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젊음’의 용인될만한 악덕이라고 해 두자.


여하튼 그래서 나는 멈추지 않고, 주랑을 따라 계속 걸었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먼지와 피가 묻은 나의 발로 더럽히며, 짐짓 경건하게 한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대한 돌 문을 마주하게 됐다. 왠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란 언젠가는 열려야 하는 법. 나는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육중한 돌 문을 떠밀어 열었다. 아. 그곳에는 거대한 여신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돌로 만들어지고, 창백하고, 우스꽝스럽게 우상화된.


바로크 풍으로 몸을 베베 꼰 삼차원적 대리석상 앞에서도, 품에 안은 아이를 내려다보는 목각상 앞에서도, 갇 이즈 어 우먼의 권위를 뾰족한 힐 끝에 담은 황동상 앞에서도, 나는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죄를 대속하듯 고통받고 있는 여신상도, 섭리와 조화를 설파하는 평화의 어머니도, 달콤한 품을 내어주듯 두 팔을 벌린 연인으로서의 여신상도,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토록 듣기를 고대했던 목소리, 계시, 삶의 지침을. 그래서 나는 성지순례를 떠나온 비참한 수도사처럼,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맨 몸으로 엎드려 말씀을 간구했다. 사람은 영원히 길을 잃고서는 살 수 없는 법.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나를 종전에 길을 잃고 헤매었던 무섭고 비참한 숲 속으로는 부디 다시 돌려보내지 마시기를. 그렇게 한참을 탄원하고 부탁하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회랑은 고요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엎어져 있었을까. 나의 몸에 묻은 때와 먼지와 피와 흙이 정갈한 신전 바닥을 더럽힘을 알게 된 신도들이 내 양 팔에 팔짱을 끼곤 이 비참한 몸뚱이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아마 곧 알게 되겠지.


바로, <저 아래>로. 그들은 나를 낭떠러지 끝에서 집어던졌던 것이다. 빌어먹을! 위생법 위반으로 말이다. 이게 정녕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실낙원의 고통. 두 발로 올라갔으나 몸뚱아리로 떨어져 버렸다. 그 까마득한 곳에서부터. 얼마나 추락했을까. 내가 착지한 곳은 아무도 찾을 것 같지 않은 음습한 늪지대였다. 역겨운 이끼가, 내 뼈를 산산조각 나지 않도록 푹신하게 받쳐주었다. 그곳에서 뚜렷한 형상을 지닌 것들은 없었다. 모든 것이 끈쩍한 액체 속에 녹아들어 갔고, 맥없이 핀 꽃마저도 곰팡이 포자를 닮아있었다. 걷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 나는 두 손을 휘저으며 늪지대를 벗어나 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손을 휘저어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는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더 깊이, 더 깊이.


그리고 마침내 그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때, 늪지대의 <끝>이 보였다. 늪지대는, 폭포처럼, 어느 지점에선가 끝나버렸고, 그 <끝>으로부터는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드디어 끝이라니! 이 개 같은 노인네. 나는 현자를 생각하며 몇 마디 욕을 지껄였다.


이 끈적한 그림자의 영역을 빛으로 모조리 태워버리려는 듯. 나는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헤엄쳤다. 드디어 <끝>에 도달했다. 나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태양이 나를 태워버리도록. 그리고 내 온 존재를 감싸버리도록.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그 후에 나는 ‘다시’ 떨어졌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어디로 떨어졌는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눈 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거기에는,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만이 있었다. 거대한. 마치, 신상처럼 서 있는. 그리고, 그의 배에는 깊게 패인, 피 흘리는 상처가 있었다. 몸뚱아리에 난 거대한 균열. 그 속으로부터 늪지대의 끈적끈적한 피가 탄식하듯,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내 몸에 묻은 꾸덕한 피를 닦아냈다. 그 후에는 이 거대한 인간이 그렇게 서서 피 흘리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래도록. 내 미약한 정신이 견딜 정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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