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곱창볶음 편
전날 저녁, 집 앞에 순대곱창볶음 트럭이 왔다. 매주 금요일마다 오는 트럭이기에, 금요일이면 으레 순대곱창볶음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순대곱창 대를 주문하고 앞에서 포장 대기를 하고 있는 데 주인 분께서 비닐포장을 불쑥 내밀며 나를 보며 크게 말한다.
"아가씨! 순대곱창 대 사이즈 맞죠?"
"네..."
이 대화의 포인트는 '아가씨'라는 단어에 있다.
만약 내가 진짜 아가씨였다면. 이 말은 그저 흘러가는 기억조차 남지 않는 별 것 아닌 대화였겠지만. 나는 3살 아기를 키우고 있는 아줌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내심 '아, 내가 아직 어려 보이나? 아줌마 같아 보이진 않은가 보다.' 쓸데없고 웃기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사장님 입장에서 '아줌마' 보단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훨씬 리스크가 덜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줌마'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힘, 그리고 어감 자체가 풍기는 불쾌함. '아줌마'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굳이 검색해 볼 필요는 없다. 그냥 보편적인 인식에 대해서 말한 것뿐이다.
사장님은 현명한 선택을 하신 게 맞을 거고, 나는 사장님의 완전한 단골이 되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일뿐이다.
그렇다. 30대 후반에 다다르면 얼굴, 머릿결, 피부 탄력 등등 온갖 외모적인 것들이 예전 같진 않다. (이건 장기들도 마찬가지 인 듯하다.) 노화라는 과정을 몸소 체험 중이라, 잘 알고 있다. 사실 '노화'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일조차 싫을 정도로 겪고 있는 현상을 인정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아직도 너무 어린데? 전혀 성숙하지 않은데?"
그런데 나이는 이미 40 가까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신체는 청춘의 흔적들을 티 안 나게 하나씩 지워나가려는 듯하다. 말갛게 반짝이던 두 뺨 위에 내려앉은 기미, 빵빵하게 부풀었던 양 볼이 쪼그라든 것처럼 신체는 확실하게도 제 할 일을 해나가고 있다.
거울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급하게 조바심이 난다. 20대의 내가 꿈꾸던 30대의 모습을 지금의 난 갖추고 있는가? 평범한 집 한 채, 적당한 차 한 대, 귀여운 2세, 사랑하는 남편. 이 정도면 내가 꿈궈온 30대의 삶을 영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까.
30대 초반이 겪는 불안정함과 달리, 30대 후반의 나는 결국 내가 원하던 바를 이뤘다. 평화로운 가정의 이룩 정도가 나의 꿈이라고 제한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이상하게도 40대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나 현실감이 떨어지기에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데 곧 마흔이다."
마흔을 코 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난 아직도 꿈을 꾼다. 지극히 개인적인 꿈.
꿈을 꾼 대가로 보상만 받으며 살아갈 것 같은 나이, 마흔. 그러나 여전히 나는 꿈을 꾸며 살아간다. 그리고 여전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온종일 떠올린다. 하드웨어와 달리, 소프트웨어는 쉽사리 늙지 않는다. 내 아이가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꿈.
나 스스로 주눅 들지 않고 이 생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꿈.
누군가에게 자랑스러운 자식, 또한 자랑스러운 엄마이기를 바라는 꿈.
유치할지언정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 없는 사소한 감정들이 모여 나의 40대를 위한 목표를 만든다. 혹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마흔은 여전히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다. 여전히 나약하고, 여전히 소모적이지만 결국엔 쟁취할 수 있는 굳건한 마음을 다잡더라도 상관없는 때이다.
이제 와 뭘 하겠어.
이제 난 틀렸어.
서른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고?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우리 모두 경험했잖아.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다. 받아들이고 노력해야 한다. 마흔이 되면 응당 괜찮아 질 것이라 생각하지 말자. 내 눈앞에 펼쳐질 세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나는 마흔에 준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