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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Sep 11. 2023

47. 그래도 할 건 다 한다

자장면이 쏘아 올린 작은 공

때는 바야흐로 꽃피는 계절 3월, 내가 대학교 문턱을 갓 넘은 때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경영학과 학생들은 전공수업의 70%까지 영어로 수강해야 졸업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경영학원론은 호탕한 미국인 교수님의 강의였다.


계단식 강의실 맨 앞 줄에 앉아서 수업시간을 기다리던 중, 뒷문을 열고 뽀글 머리 남학생이 등장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장기자랑으로 당시 핫하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역할을 맡아 열연(?)했던, 일명 ‘구정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머리를 더 강조하는 구준표 펌을 실제로 하고 있었다(정말이지 도전적인 스타일…). 커다란 얼굴엔 여드름이 덕지덕지 나고 머리크기와 대비되는 비쩍 마른 어깨는 그의 존재감 큰 두상만 강조해 줄 뿐이었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세상 반가울 신입생 때라, 나는 손을 흔들며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미국인의 생생한 라이브 발음을 처음 들어보고 정신이 혼미했던 구정물씨. 전자사전도 꺼내놓고, 녹음기도 켜보고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그는 결국 내 도움이 필요했고 그로부터 종강할 때까지 같이 앉아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의에 집중하다가 문득 보게 된 그의 적당히 투박하면서도 길고 예쁜 손에 자꾸 눈길이 간 것은 안 비밀. 빈약한 어깨와는 달리 캘빈클라인 청바지에 가려진 ‘말벅지’로 불리던 하체는 대반전.


‘눈썹도 잘생겼고, 목젖도 예쁘군. 목소리도 좋구나. 뜯어보니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학기 초에 어떤 선배의 추천으로 축구소모임에 들어갔는데, 그곳에도 구정물씨를 봤다. 난 과외와 알바가 많아서 거의 참여하지 못했지만, 한 번은 과외가 펑크 나서 축구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경기 후에 다 같이 자장면을 시켜 먹었는데, 그는 자장면 한 그릇을 세 젓가락에 끝내고는 두리번거렸다.


“이것도 먹어도 돼.” 나는 이미 식사를 하고 온 터라 그에게 내 자장면을 건넸다.


“그래? 땡큐.” 그렇게 그는 그 자리에서 자장면 두 그릇을 클리어했다.


그날 밤, 그에게서 고맙다는 첫 문자를 받았다.


어느 날 그가 깔끔하게 이발을 하고 왔을 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머리는 여전히 거대했지만, 드디어 사람다워 보였다.


“이제 구정물씨 아니네?” 내가 던진 농담에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이름 석자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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