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커리어 차원에서 단점이나 약점이 뭐냐고 물을 때마다 하는 대답이 있다. 바로 성공적인 브랜딩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브랜드 캠페인을 한두 번 성공적으로 이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성공 방정식을 만들거나 에셋화 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이에 계속 내 능력과 방향을 계속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고 내부 구성원들을 align 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더욱 그렇다.
과거의 나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주니어 브랜더(브랜드 마케터)를 위해 부족하나마 기록을 남긴다.
초보 브랜더를 위한 브랜딩 마인드셋 세 가지
1. 브랜딩은 '협의'가 아니다.
3년 남짓한 경력을 쌓았을 때, 조직 내에서 '우리도 브랜드북을 만들어 보자'라는 니즈가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했다. 디자인 가이드뿐만 아니라 우리 브랜드는 왜 존재해야 하며, 우리가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핵심 가치는 무엇인지, 우리의 메인 타깃(페르소나)은 누구인지 등등.
실무자들끼리 메타브랜딩의 브랜드 캔버스를 채워보기로 했다.
(출처: 메타브랜딩, ㅍㅍㅅㅅ)
언뜻 보면 너무나 간단하고 몇 분 걸리지도 않을 것 같은 시트인데 우리는 꼬박 12시간 이상을 썼고, 심지어 다 완성하지 못한 채로 막차를 타고 갔다.
문제는 각자 시트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논의를 거쳐 결정된 하나의 답을 통합 시트에 채우는 데 있었다. 우리의 철학과 속성을 왜 이렇게 작성했는지 맥락을 공유하고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느라 상당한 시간을 썼다.
우리 브랜드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①결과물을 내서 ②분명한 브랜드 방향성을 만든다는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이 논의에 참여한 구성원이 적절한지, 의사결정을 어떻게 할 건지도 깊게 고민하지 않은 채 '일단 모이고 보자!'라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으니 배가 산으로 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이런 실수를 여러 번 반복했다. 브랜딩, 그러니까 브랜드의 철학을 만드는 데는 정답이 없는데 정답이 있다고 믿고, 혹은 함께 이야기하면 정답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었던 게 패착이었다.
자꾸만 주변의 의견을 구하고 타협점을 찾으려 했던 잘못된 습관은 비교적 최근에 고칠 수 있었다.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하면서 최소현 전 퍼셉션 대표님께서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지 곁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방법과 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전까지는 '내가 결정해도 되는 게 맞는가' 하는 불안감에 쌓여 집단지성이라는 미명(?)하에 나와 우리 구성원들, 나아가 우리 브랜드까지 참 고생하게 만들었다.
(출처: 전우성 브랜드 디렉터 페이스북)
브랜딩의 방향성은 합의가 아닌 선언이다.
물음표 가득했던 내게 느낌표를 던져주었던 전우성 브랜드 디렉터님의 글. 마음이 불안할 때면 꺼내보려고 아직도 앨범에 간직하고 있다.
2. 브랜딩은 반복이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브랜딩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잘 전달하고 싶다면 700번은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GE회장이었던 잭 웰치도 강조한 내용인데, 기업의 핵심가치는 700번 이상 반복해서 전달해야 하며, 그래야 직원들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도 저마다 가치관이 있지만 가치관대로 행동하지 않거나 한두 번 행동하고 그만둔다면 그 가치관이 진심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좋은 말이 진정성, 힘을 가지려면 반복만이 답이다. 브랜드가 가진 정체성과 철학을 내외부 고객이 진짜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700번, 어쩌면 그 이상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반복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선택에 자신이 없어서일 때도 있고, 너무 마이크로 매니징 하면서 팀원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멈칫한 적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타운홀 미팅에서 우리 브랜드,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브리프 하고, 어디에 브랜드 가이드라인과 에셋들이 있는지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프로젝트에 우리의 약속(선언)이 반영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다 보면 반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지겹고(관리자 입장), 반복해서 듣는 것이 지겨워도(실무자 입장) 지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건 내재화가 되지 않은 것이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반복이 과도해질 때는, 반복하지 않아도 약속이 지켜질 때다. 그때까지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3. 브랜딩은 타협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스스로 내린 결정에 확신이 없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디렉터의 말로는 결국 타협이 아닐까.
브랜딩을 하다 보면, 브랜딩에 엣지가 없어지는 이유는 '명백한 오답' 때문이 아니라 '그럴듯한 부분 정답' 때문인 경우가 많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또 우리가 약속하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을 때.
가이드라인을 만든 이후에도 단어 선택부터 글의 톤 앤 매너, 디자인까지. 크고 작은 부분에서 타협하기 쉬운 상황들이 튀어나온다. UX Writing 가이드에서 제시하는 표현과는 다르지만 채널의 특성상 워딩을 바꾸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경우, 공식 폰트가 정해져 있으나 디자인 스타일과 맞지 않는 경우 등등. '조금 바꾼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절대 안 되는 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깨진 유리창 이론: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
아직 브랜드 아이덴티티나 그 디테일이 뿌리내리지 못한 경우라면 더더욱 보수적으로, 타이트하게 관리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700번 반복해도 충분하지 않을 가치 전달 과정에 굳이 '함정 카드'를 끼워 넣을 이유가 있겠는가.
나 역시 나름대로 꼼꼼하게 살피고 디렉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유리창에 금이 가다 못해 깨지기 직전에 발견한 충격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우리 브랜드의 로고가 워드마크형(텍스트형)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실무자가 svg나 png 이미지 파일이 아니라 텍스트로 대체해 버린 것이다. (...) 본인은 비슷하게 생겨서 티가 안 난다고 생각했겠지만 절대 아니다.
물론 내가 직접적으로 타협한 경우는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내가 타협한 것들이 이렇게 나타난 건 아닐까 싶어 충격이었다.
왼쪽이 정식 로고. 오른쪽은 노토 산스로 작성한 로고인 척하는 무언가.
어쩌면, 브랜딩에 필요한 최초이자 최후의 마음가짐
타협은 쉽다.
구성원들에게 이게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고, 알아서 하겠거니 하는 것 또한 쉽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취합해서 둥그스름하고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면 안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브랜드만의 아이덴티티, 철학이라기보다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을 방법을 찾는 것에 가깝다.
지난 실패를 돌이켜보니, 어쩌면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에겐 우리다운 것은 이런 것이라는 확신, 저건 우리답지 않다고 말할 용기,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할 용기가 없었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기에, 우리가 탄 배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과거의 나에게 딱 한 가지 조언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 브랜드를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이 생각한 게 너니까 조금 더 확신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