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우리 브랜드의 이야기가 엣지 없는 것 같다면
벌써 1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지만, 극작과 입시를 준비했던 시절 가장 가혹(?)했던 과제는 n일 동안 로그라인(Logline) 100개를 써오는 것이었다.
로그라인을 검색해 보면 '이야기의 방향을 설명하는 한 문장', '한 문장으로 요약된 줄거리'라고 나오는데, 이야기의 방향성을 잘 설명하려면 구조적인 조건이 붙는다.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인물은 어떤 욕망이나 결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 욕망이나 결핍이 생기기도 하지만, 분량이 짧은 경우 이미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주인공의 욕망이나 현실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번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해결과 좌절 과정)이 이야기의 방향성이 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로그라인을 만들어 보면 이렇게 작성해 볼 수 있다.
1)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만 자폐를 앓는 우영우가
2) 대형 로펌 ‘한바다’의 변호사가 되어
3)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
브랜드 스토리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있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그 방법들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기업 브랜드 하위에 서브 브랜드도 다양했고, 브랜드의 특장점을 강력하게 어필해야 할수록 이것저것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서 결국 기억에 남지 않는 플랫한 스토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브랜드 마케터로서 자신의 브랜드를 사랑할수록(?) 후자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많을 텐데, 나의 경우에는 IR Deck의 내러티브를 만들 때 특히 그랬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우리 브랜드가 가진 잠재력과 임팩트를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고, '좋아 보이긴 하는데, 아 뭔가......'에서 그치곤 했다.
그때 생각났던 게 바로 저 로그라인 작성법이다.
어웨어는 커피 추출과 머신 관리, 커피 정보 안내 등 바리스타의 전문 영역을 클라우드 기반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커피머신이다. 커피전문점에서 주로 사용하는 반자동 커피머신에 비해 섬세하고 개인화된 추출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전자동 커피머신을 혁신하기 위해 개발한 제품이다.
당시 우리 회사는 원두를 직접 개발・판매하고, 오피스 커피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업계에서는 나름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왜 굳이 (스타트업으로서는 그리 힙해 보이지 않는) 커피머신을 직접 개발까지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오히려 하고 있는 원두 사업이나 구독 사업을 잘 키워보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속 원두를 볶고, 커피 구독 서비스를 잘 운영하기만 해도 우리 회사는 충분히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구독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용이한 비즈니스 모델이었고, 아직 초기 시장이긴 하지만 업계에서는 2위와 제법 차이가 나는 1위였으니까.
하지만 커피 비즈니스는 고객들이 마시는 커피 한 잔이 곧 '완성품'이었다. 원두나 서비스가 아니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객이 좋아할 것 같은 원두를 개발하고, 때맞춰 문 앞까지 배송을 해드린다고 해도 추출하는 마지막 과정에서 어긋나면 충분한 고객 경험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커피머신 개발이 필요했다.
이렇게 내가 네 문단을 할애해서 적은 어웨어의 탄생기는 로그라인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 원두를 제조/판매하며 추출 이전 단계에 고객 가치를 만들어 오던 브라운백이
2) 완성된 커피 경험을 위해서는 추출 단계의 솔루션이 필요함을 알게 되고
3) 세계 최초의 클라우드 커피머신 ‘어웨어’를 개발하는 이야기
그래서 우리의 IR Deck은 '커피머신을 왜 혁신해야 해?'라는 질문에 답하고, 커피머신을 클라우드로 혁신했을 때 만들어 낼 수 있는 비즈니스 임팩트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IR Deck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디자인을 할 때는 하고 싶은 수만 가지 말과의 싸움이었다. 내가 믿고, 만들어 나가는 프로덕트의 가치를 다른 사람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한 가지의 이야기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조차도 우리 프로덕트의 핵심을 몰랐던(확신이 없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마다 한걸음 물러서게 된다. 그리고 내가 지금 무엇을 얻고 싶고, 그러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한다.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말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리되지 않으면, 전달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