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엄밀히 우리 반은 아니었다. 왜 그랬는지 한 학기 동안 생물학 실험을 우리 반에 와서 들었다. 자주 내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얼굴이 희고 고왔고 웃을 때 입을 크게 벌려 환하게 웃곤 했다.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흘렀지만 말이 없고 선하게 웃던 그 아이 생각이 가끔 난다. 그 아이를 기억할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건 필통 안에 들어있던 연필이다. 필통 안에는 나무도 길게, 심도 길게 깎은 연필이 대여섯 자루 들어있었다. 일본에서 개발된 샤프가 내 손에 들어온 게 중학교 때였으니 대학교 1학년이던 당시 너도나도 샤프를 썼으나 그 아이는 연필만 썼다. 물론 샤프 품질이 지금처럼 좋지 않아 자주 망가지고 심도 잘 부러져서 여벌로 연필이 필요하긴 했으나 그 아이처럼 필통 한가득 연필을 가지고 다닌 애는 많지 않았다. 그 연필로 현미경에서 본 세포들의 점을 어찌나 꼼꼼하게 찍는지. 그 아이가 그린 세포 그림은 담백하고 깔끔했다.
“연필을 예쁘게 깎는구나.”라는 말에 그 아이는 “응. 우리 엄마는 더 잘 깎아주셨어.”라고 말했다.
응? 엄마가 깎아줬다고?
아니. 우리 엄마는 나 5학년 때 돌아가셨어. 새벽마다 낫으로 연필을 길게 깎아서 필통에 넣어주셨어.
아. 엄마가 돌아가셨어?
아.... 아니야 괜찮아. 오래됐는걸.
담백하고 맑은 그 아이와 대화를 할 때면 공부를 뒷전에 두고 현실에 나가 뒹굴고 있는 내가 어딘지 모르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가끔 생각이 났지만 1학년 이후에는 그 아이를 보지 못했고, 이름도 까먹었고, 2학년 때 무슨 과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고, 오직 부천에 살았다는 것과 연필을 깎아 다녔던 것만 기억하고 있어서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같은 계열이었던 동창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아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 기억 속의 아이를 알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기억을 들은 친구는 누군지 알 것 같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자기랑 같은 과였고 지금은 전공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친구 말에 의하면 능력이 뛰어나서 사업도 안정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여성 CEO가 되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누군가 너를 기억하고 있고,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친구가 전했을 때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흘러나왔다.
"언제 한 번 오라고 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니 한번 보지 뭐. 너 밥 먹으러 올 때 같이 와."
나는 그냥 서로를 기억하는지 궁금했고 그 아이도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 아이로 추정되는 그 CEO는 자신을 기억하는 나를 그리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전화기로 엿듣게 된 그 목소리에서 졸부의 허세랄까 귀찮은 잡상인을 물리치는 무미건조한 내공이랄까 아무튼 CEO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전화를 마친 친구가 "언제 같이 오라고 하네."라고 말했을 때 내 비뚤어진 인성은 평생 그 아이를 볼 일은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마 추억이 주는 맑은 느낌이 박살 났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약간 분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추억을 박살 낸 건 나였다. 기억을 훼손시킨 건 바로 그친구가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 내 인성이 비루한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추억까지 버릴 건 뭐냐? 그 아이는 그 아이의 삶을 사는 것을.
그래서 추억을 다시 담아두기로 한다. 박살난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아직 그대로였다. 완벽하게 그대로였으면 좋으련만, 금이 살짝 가고(조금 많이) 빛이 조금 바래었다. 지금 그 아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에겐 대학 1학년 풋풋한 시절에 아주 길게 깎은 연필을 필통에 가득 넣어 다니던 맑고 고운 한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