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전혀 게으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바빴다. 나에겐 일을 처리하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나만의 자부심이 있었다.어떤 일을 맡으면 그것이 성과를 낼 때까지 내 손을 거치면서 산 정상의 정점을 찍 듯 완성시키는 것 그것이 나였다. 그렇게 내가 한 일을 나의 작품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번에 이 교육을 하는데 가고 싶습니다. 가도 될까요?" 프로젝트가 한창인 시기인데 교육 공지가 떴으니, 교육을 가고 싶다는 부서원은 우리 부서에만 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지금 상황을 몰라서 저러는 거야, 너무하네.'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고, '아니, 왜 하필 지금이야? 본인 일이 홀드 되는 게 괜찮다는 건가?'라는 책임감 부재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상사에게 지금 한창 일이 바쁘고 야근도 많지만 부서원들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기회가 될 때마다 표현하려노력하는 나의 입장에서 팀원의 교육 부재는'내뱉은 말의 불일치'와 같았다.
"미안한데, 지금 일이 너무 바빠서 다음에 가면 안 되겠어요? 지금 교육을 가면 당장 A일이 지연될 거예요." 교육 가겠다는 부서원을 설득해 가는 과정은 난감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교육 참석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두 가지 결론 다 부서의 리더인 나에게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동의할 경우, 일이 밀려 전체에 영향이 있을 것이 불안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부서원에게 부탁하거나, 아니면 내가 그의 몫을 하는 것이다.
일이 부쩍 바쁜 시즌에 교육가는 동료의 일을 흔쾌히 맞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전체 프로젝트에 펑크가 안 나도록 메꿀 수밖에 없었다.
"일정 및 인력관리에 신경 좀 써주세요."라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모든 것을 빈틈없이 하고 싶은 나의 자부심을 갉아먹는 일이었고,뭔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 불안함이 컸다.
난 말 그대로 낀 리더였다.
다른 사람이 하고 간 미완의 일을 뒤처리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미완의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나눠주는 일부터 내 일의 시작이 되었다. 점점 더 일은 불어갔고, 하루 일을 처리하면 그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은 부서원에게 맡길 수 없는 중요한 일이고, 저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같았고, 또 다른 일은 무척이나 급한 일이어서 내가 하는 편이 마음 편한 길이었다.
아침에 팀원보다 일찍 출근했고, 어떤 날은 내가 사무실의 불을 끄고 퇴근하기도 했다. 가족을 위한 여행 1주일 동안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려나 아무리 먼 타국에서도 남몰래 촉수를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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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재의 눈으로 바라보는 과거의 내 모습은 애사심이나 일에 대한 책임감을 떠나 불안에 가까웠다. 언제 새로운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감, 다음 일도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아울러 시간의 흐름 속에 더 많은 사람의 리더가 되면서, 나 혼자의 결과가 아닌 함께 만드는 결과에 대한 리스크와 불확실함은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전체 일이 틀어질까 쓴소리를 부서원에게 해야 한 것도, 그 후의 눈치를 보며 씁쓸함을 견디는 것도 나만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는 그 바쁨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충만한 삶을 사는 듯했다.
'난 게으르지 않다. 난 나의 최선을 한다.'라는 마음 거울 뒤편에는 나는 '진짜'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OO님은 불러주는 곳이 없지?"
어느 날 한 임원이 내게 말했다.
그분은 나의 기능을 알아보고, 유용이 써주시는 상사였다. 나는 그분에게 300명 가까운 팀 안에 몇 명 안 되는 모닝 티타임을 같이 하는 부서원 중 하나였다.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OO오라고 해" 하며 나를 찾으시곤 했다. 그때 누군가 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꽤 좋은 조건의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한다고 했다.
퇴사원의 얘기를 하며 그분이 나에게 건넨 그 말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 질문에 무슨 의도가 담겨있었던 것인지.
그저 기억나는 것은 "OO님은 불러주는 곳이 없지?"라는 말에 내가 반박하지 못했던 것, '내가 갈 곳이 있나?', '만약 회사를 나간다면 나는 어디를 갈 수 있을까?' 내 마음 안에나는 '진짜'에서 '가짜'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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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몇 년을 주어진 일에 큰 보상 바라지 않았고, 묵묵히 내 일을 해 나가고 있는 나는, 누구보다도 성실했고 나름의 기여를 했던 나는, 회사 밖에 몰랐던 나는, 나보다는 일을 더 생각했던 나는 무엇을 손에 쥐었던 것일까? 나의 작품에 대한 우직한 자부심이 갈 곳 없는 절박함으로 바뀌어 있었고, 주위를 돌아보니 십몇 년 회사생활에는 내 것이 없었다.
그런데 과연 이 길고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오직 나만의 안타까운 서사일까?
등장인물은 다를 수 있으나, 서사 안에서 내가 느낀 외로움, 불안함, 서운함,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는, 사연 없는 리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