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넘어보고 싶을 때 <노 임팩트 맨>
“절대 뉴욕을 떠나지 않는다. 누릴 것은 충분히 누린다. 하지만 쓰레기도, 대중교통도, 전기도 안 된다!”
한 남자(와 엉겁결에 그의 가족)가 선언합니다.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활을 1년간 지속하겠다는 이른바 ‘노 임팩트 프로젝트’입니다. 훌륭한 일입니다만, 강원도 산골도 무인도도 아닌, 뉴욕 한복판에서요?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가고, 온갖 유행이 태어나고,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마천루와 소비문화가 번쩍이는 바로 그 뉴욕 한복판에서, 가능할까요?
처음에는 멋모르고 덤빈 듯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친환경과 관련한 이런 저런 풍문들에 둘러싸여 혼란에 빠집니다. 어디에선 ‘사기잔을 씻는 데 드는 에너지가 천 년 동안 썩지 않는 일회용 플라스틱컵을 사용하는 만큼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고, 누군가는 ‘뜨거운 물과 세제로 걸레를 빨면 키친타월을 만드느라 나무를 베는 것보다 더 심하게 환경을 손상시킨다’고 합니다. 하지만 물론, 가장 강력한 목소리는 ‘광고’입니다. 당신 혼자 그래봐야 소용 없다는, 그냥 남들처럼 흥청망청 살아보라는 그 끈질긴 유혹은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하게 보이고, 더 강하게 발목을 붙듭니다.
그러나, 어느 날, 더 이상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 위해 그때까지 집에서 나온 쓰레기 더미 앞에 앉아있던 작가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닥에는 나의 삶이 펼쳐져 있고, 어느 고고학자가 천 년 뒤에 나의 삶을 연구할 때 어떤 걸 보게 될지 보자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삶이 쓰레기를 낳는다면 그건 내 삶이 어떻다는 뜻일까?”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굳이 쓰레기통을 뒤집어 바닥에 펼쳐보지 않더라도, 쓰레기들-이미 ‘쓰레기’가 된 것들과 곧 ‘쓰레기’가 될 것들- 사이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거리를 걸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고작 20분을 위해 플라스틱컵과 빨대를 아낌없이 쓰고, 마트 진열대에 놓여 있던 채소 포장 용기는 집에 와서 요리를 시작하는 동시에 버립니다. 한 철 지난 옷은 좀처럼 다시 입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고, 찬장마다 쓰지 않는 컵과 그릇이 수북합니다. 제 아무리 한눈에 반한 물건도 소유하는 순간, 쓰레기가 되어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생활은 예상보다 난관도 많고, 깨달을 것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쓰레기 문제가 ‘시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어떤가요? “유혹을 느끼면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지난날과는 이별을 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탄산수도 안 되고 종이컵에 담아 파는 허브티도 안 되며, 비닐 포장된 과자나 영화관에서 파는 팝콘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욕망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동안 작가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많은 소비는 일상의 분주함을 차단했던 “하품의 시간”을 대체했다고. 그리고 이런 분주함은 “경제의 성장”을 위한 악순환의 동력이며, 그 와중에 우리는 기분 전환이 될 만한 물건을 사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에 매달리게 되는데, 그런데 정작 왜 그러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실험은 아마존 밀림에 들어가 악어떼와 마주하는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실감나는 모험처럼 보입니다. 환경을 걱정한다면서 멀쩡히 쓰던 제품들을 놔두고 ‘친환경’ 제품들을 추가로 사들이거나, 배달앱에서 주문을 할 때 일회용 수저를 빼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뿌듯해 하는 얼치기 시민들에게는 더더욱요.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거나 더 부유해지는 것보다, 너무나 당연해진 욕망과 유혹 사이에서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하지 않는 것, 이 지금은 어쩌면 더 우리의 한계를 넘는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알찬 정보는 없고 기업의 PR만 넘쳐나니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어디에선가 사기잔을 씻는 데 드는 에너지가 천 년 동안 썩지 않는 일회용 플라스틱컵을 사용하는 만큼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들은 적이 있었다. 뜨거운 물과 세제로 걸레를 빨면 키친타월을 만드느라 나무를 베는 것보다 더 심하게 환경을 손상시킨다는 연구결과도 들은 적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정보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뭐든 좋을 게 없었다.
광고회사에서는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봐야 헛수고라고 나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나더러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플라스틱컵을 그냥 버리라고 했다. 다 쓴 배터리를 버리면 얼마나 해롭겠느냐며 전기 자동차는 잊어버리라고 했다. 까짓것, 그냥 흥청망청 사는 거야. 거짓 정보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 땅을 짓밟지 않고 잘 살 방법은 없어.(42)
나는 좀더 효율적인 생활을 위해 고안된 물건이 그렇게 많은 오염물질을 야기하는 모순을 애써 잊어버리려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쓰레기를 주우면서 옷에 무언가를 묻히고 있을 뿐 아니라 위안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
이론상으로는 이런 테이크아웃 음식 덕분에 내 몸과 우리 가족을 챙기는 데 드는 시간이 줄어들어 여유가 더 많아져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 집에서는 생활이 편리해지면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는 게 아니다. 일할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다. 결국에는 우리 모두 이 ‘편리함’을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하루에 열두 시간씩 허리가 부러져라 일을 하고 있다.
도심에서 일을 하는 내 아내 미셸을 예로 들어보자. 점심시간이 되면 그녀는 개미집에서 빠져나온 개미떼처럼 초고층 빌딩에서 쏟아져나온 수많은 인파 속으로 합류해 15달러짜리 테이크아웃 음식을 산다.
그런 다음 여느 미천한 노동자처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을 하며 점심을 먹는다. 연봉을 인상받으려면 계속 일을 해야 한다. 연봉이 인상돼야 1년 동안 자기 자리에서 먹을 점심을 사는 데 드는 5천 달러를 감당할 수 있고 그렇게 일을 해야 연봉이 인상되고, 그래야 자기 자리에서 먹을 점심을 사는 데 드는 5천 달러를 감당할 수 있고...(64)
쓰레기 앞에 앉아 있으면 바닥 위로 펼쳐진 나의 삶이 보이고, 어느 고고학자가 앞으로 천 년 뒤에 나의 삶을 연구할 때 어떤 걸 보게 될지 내 눈에 보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죽음이 죽음을 낳는다면 쓰레기가 쓰레기를 낳는 걸까? 만약 내 삶이 쓰레기를 낳는다면 그건 내 삶이 어떻다는 뜻일까? 자원을 낭비하는 게 인생을 낭비하는 증거일까?
쓰레기와 함께 바닥에서 30분을 보낸 뒤 나는 존재론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경험 말고도 내 인생에 적용시켜 이 모든 쓰레기들을 어찌할 수 있는 더 광범위한 가르침이 있을까?(67)
이렇게 해서 문득 생각난 이론.
기계로 만들어진 교통수단과 개인 통화기기와 휴대용 컵에 담긴 커피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스트레스 받는 일 중간에 휴식시간이 있었다.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있거나 엄청난 파티에 참석해야 하거나 여자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 그사이에 숨을 돌리는 시간이 있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택시를 타고 스트레스 받는 다음 일을 처리하러 움직이지 않았다.
휴대용 컵이 없으니 대신 그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전화가 없으니 그저 쉬었다. 그때에도 스트레스 받는 사건들이 있었따. 하지만 그사이에 하품을 하며 부담을 더는 달콤한 시간이 있었다.
내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머리를 여기에서 저기로 실어나르는 기계로 만든 상자와, 우리를 끊임없이 연결시키는 휴대용 전자기기가 우리에게서 하품의 시간을 빼앗아갔다. 주기적으로 깜빡여 교통을 멈추고 정적을 선사하는 빨간 신호등처럼 나날의 분주함을 차단하는 이런 시간들이 잘려나갔다. 이제는 피크타임이 지나면 다시 피크타임이 이어져 아예 아코디언 주름상자처럼 쭈그러들어 한데 붙어버린 꼴이다.(125)
그 대선사님은 “모두들 나는 이걸 가지고 싶다, 저걸 가지고 싶다 하는데, 이 ‘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종종 말했다. 세상 모든 걸 가지고 싶어하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갈까? 사는 이유가 뭘까? 죽는 이유가 뭘까?
이런 고민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해진다고 믿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고, 경제는 이 끝없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이 별의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들 나는 이걸 가지고 싶다고, 저걸 가지고 싶다고 한다.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해진다는 우리의 전제가 사실이라면 좋다. 그렇다고 치자. 경제는 당연히 욕구 충족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더 이상 남은 게 없을 때까지 모든 것을 태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왜 했을까?
내가 알기로 예수는 부자가 되면 안 된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더 급한 일들을 배제할 정도로 부에 집착하면 많은 시련을 초래할 수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우리가 이 ‘나’라는 존재와 나의 진짜 목적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욕구를 채우느라 지구를 파괴해놓고 그런 다음에야 우리가 사는 이유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야말로 하던 일을 멈추고 고민할 만한 문제가 아닐까?(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