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마주하고 싶을 때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내 살은 거럴 우예 다 말로 합니꺼?” 한국에서 ‘없이’ 산 노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넋두리라고, 이 책의 저자는 전해줍니다. 돈 없이 힘 없이 산다는 것은, 벗 없이 말 없이 산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기에, 그런 ‘살은 거’의 이야기는 들어줄 귀도 남겨줄 펜도 만나지 못한 채 사라지곤 합니다. 결국 그렇게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삶을 나눌 매개든 관계든, 을 붙들어두기 위해 우리는 ‘있는’ 사람이 되려고 이토록 아등바등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 삶다워지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가고 있는 것들은 정말 의미 있는 것일까요.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는 이 사회는, 이 시대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멈추게 만드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삶의 균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요.
이런 생각을, 이토록 아등바등 살아내는 와중에도, 우리는 종종 합니다. 가령 몇 달만에 뵌 부모님이 부쩍 늙어 보일 때, 사고 소식을 갑자기 들었을 때, 목표가 무너졌을 때, 누군가가 감정을 터뜨렸을 때... 그리고 “내 살은 거럴 우예 다 말로 합니꺼?”라는 문장을 읽을 때, 문장을 마치는 물음표가 귓가에 쟁쟁 울릴 때, 주름 틈틈이 희로애락이 뒤섞여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르겠는 노인의 얼굴이 눈앞을 덮쳐 왔을 때,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스쳐가거나, 신문 기사로 읽거나, 상상하고 꺼림칙해 하는 그 수많은 ‘살은 거’를 이 저자는 몸소 마주해 왔습니다. 그는 총선 출마 이력이 있는 활동가이자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고, 요양보호사, 독거노인생활관리사 등으로 불리는 노인 돌봄 노동자이자, 구술생애사 작가입니다. 그 자신의 삶만도 파란만장한데, 한국 사회의 틈에서 사라지려는 삶의 이야기들을 기어코 끄집어내는, 삶의 전령사 같은 분이지요.
“사적이고도 정치적인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만큼,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저자의 삶 자체가 구구절절 녹아 있고, 너무나도 사적으로 보이는 그 삶이 사실은 한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이 시대와 찰싹 맞붙어 있음도 에두름 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저자가 자신의 “모성애”, 혹은 “불안과 이질감과 죄책감이 뒤엉키고 헝클어진 통각과 자기 분열증”이라는 실타래를 “미친 년”처럼 집요하게 풀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모습에서 이 사회의 모양을, 이 사회가 여성에게 씌워온 틀의 모양을 어림합니다. 여성이라면, 그 삐죽삐죽함에 찔리는 순간이 없을 리 없습니다. 자신이, 엄마가, 할머니가 층층이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한 그 집요함은 곧, 삶에 대한 진심, 세상과의 불화가 진하게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여자, 특히 ’좋은 엄마‘란 막중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당사자 여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마다 해석이 제각각이며, 한 사람 안에서도 이성과 감성이 서로 배반하는 소리를 내기 일쑤다. 나 역시 내 생애 동안 그 해석을 계속 이동해왔고, 앞으로도 얼마만큼은 계속 이동해갈 것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당시 내 주변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새끼들 먹이는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지나치게 집중한다고 느꼈던 점이다. 그런데도 만 예순을 한 해 넘기고 자녀들이 37세와 34세인 지금도 그런 꿈을 꾸는 것은 ’좋은 여자‘, 그중에서도 특히 ’좋은 엄마‘에 과한 스트레스와 콤플렉스가 내 속에 지독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증거다. 내면이 그렇다는 것은 일상의 경험이 그렇다는 것이다. ’좋은 여자‘와 ’미친년‘ 사이를 널뛴 기억들, 혹은 지금도 여전히 내 일상 한 귀퉁이에 그 ’좋은 여자‘와 ’미친년‘이 웅크리고 숨어 있다.
자식을 향해 보이는 엄마들의 모성애, 특히 극단적인 상화에서 보이는 동물적 모성애를 그린 영화나 글을 접할 때마다, 나는 불안과 이질감과 죄책감이 뒤엉키고 헝클어진 통각에 휩싸인다. 그녀들의 극단적 모성애를 거울삼아, 자식에 대한 내 태도를 비춰보는 것이다. 이는 모성애라는 규범에 관한 부지불식간의 자기 감시다. 감성, 감정, 특히 동물적, 본능적 감수성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에 대해, 나는 의심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자기 분열적이 된다. 때로 감성에 치받혀 통곡을 하면서도 내 통곡의 내용물을 의심한다. ‘나는 대체 무엇에 대해 왜 울고 있는가?’ 모성애라는 타인에 대한 감성에도 그렇지만, 쌍을 이루어 같이 오는 자기 연민에 대해서는 의심의 날을 더 세운다. 울면서, 통곡하면서, 연민하면서, 그러고 있는 내 감성들을 이성으로 응시한다.(16~17)
소시민 개인이 사회구조적 피해를 입었을 때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은 그저 먼 이야기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슬픔이나 분노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내 재수나 운명 탓이니, 보상이나 받고 서둘러 끝내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다. 자신의 일이 아니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라 해도 결국 그렇게밖에 될 수 없다고 미리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합의하고 말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남겨진 슬픔과 분노를 지니고 덮으며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으로든 치환하며 살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치환의 순간과 자리마다에서 상처와 갈등과 몰이해들이 재생산되고...(76)
없는 사람들 말을 글로 옮기다보면, 힘도 맛도 가락도 깎인다. 게다가 못 배운 사람들 말을 배운 사람들이 알아먹지 못한다. 여기서는 알아먹기 위한 손질만 하고, 최대한 말 그대로를 옮기고자 한다. 가독이 어려운 김에 공부들 좀 해봤으면 싶다. “내 살은 거럴 우예 다 말로 합니꺼?”는, 서울이나 산골에서 없이 산 노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넋두리다. 글보다 말보다 ‘살은 거’가 진짜다. 말이 되지 못한 속앓이와 쏘가지와 말없음을 느리게 헤아려주길 바란다.(83)
사적 관계만 넘어서면 늙어 죽음은 감사하고 필수적인 일이다. 죽음 근처의 갖은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두 죽는다는 면에서 공평하기까지 하다. 죽음에 바짝 다가간 노인들은 말이 없다. 산 자들만 쑥덕대는 죽음에 관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무섭다느니 외롭다느니 슬프다느니 모두 산 자들의 느낌이다. 늙어 죽음은 거듭되는 소멸과 해체, 노쇠와 병증과 통증들과 느려짐과 불가능해짐에 이어 오는 것이어서, 마침내 죽음에 닿음을 마음으로 치하하게 된다. 하물며 심히 고통스러운 생애였다면 더더욱, 죽음은 보는 이에게도 위안이자 희망이다. 지난 한 달 새에 이십대 초반의 성전환자 여성과,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국회의원 노회찬이 스스로 명을 끊었다. 잠자리에 눕고 일어서며 ‘안 깨어날 수 있다’와 ‘깨어났구나’를 자주 떠올린다. 자발적 죽음을 작심하고 있지만, 죽음이 먼저 내게 부딪혀온다면 그 또한 땡큐다. 머지않은 장차에 죽음을 떠올려놓고 사느라 욕망과 일상은 점점 단출해진다.(137)
내 몸이 엄마의 지금 상태까지 살기를, 죽어가기를, 나는 바라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이전 어느 단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끝낼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생존함을 놓고 비난이나 비판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존재함’에 대해 어느 타인도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아니, 감히 그 평은 못 하겠다는 말이 정확하다. 모르겠다는 말이 가장 정확하다.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무가치하다거나 존엄하다거나를 말하지 않는다.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속임수를 더 캐어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다만 내 죽음에 대해서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기를 작심하며, 상황이 허락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회적 존재로서 내 위치와 행태를 가늠하려고 노력하듯, 사회적 존재로서의 엄마의 위치와 관계를 가늠하는 일을 접을 수 없다. 그 가늠이 무례하고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이라는 위험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위험이나 비난 때문에 회피하지는 않겠다. 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답을 찾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타인이 한 사람의 죽어가는 과정을 노려보며 글로 써나가는 이 무례함은, 어떤 쓸모를 만들 수 있을까?(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