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마주하고 싶을 때 <키키 키린>
유작인 <어떤 가족>에서 키키 키린은 그야말로 인생에 ‘닳고 닳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쁜 뜻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선함과 악랄함, 무심함과 뜨거움이 모두 있고 그것들이 별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뒤엉켜 있다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노인의 모습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맡은 캐릭터는 자신의 ‘가족’이 자신이 가진 집과 연금 때문에 함께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을 적막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는 점에 ‘그 정도면 됐어’라고 자족합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 그것만큼 키키 키린 자신을 잘 표현하는 말이 또 있을까요.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을 엮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가, 때론 기발하고 때론 유머러스하고 대체로 재치 있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낄낄대고 뭉클했습니다.
키키 키린은 말년에 유방암을 앓았는데, 병은 그에게 인생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열어준 듯합니다. 혹은, 그였기 때문에 병조차도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요.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 “아프다”라고 하지 않고 “아아 시원하다”라고 한다든가, 뭔가 거절해야 할 때 “암이 심해져서...”라고 둘러대면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한다면서 “마침 적절한 나이에 암이 걸려서, 여러 의미에서 이걸 유용하게 쓰고 있어요”라고 한 구절을 읽으면서 미소 짓지 않을 도리가,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것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뒤집어 이렇게 죽어갈 수도 있구나,를 깨우쳐주는 그런 말들이라서요.
죽음의 본보기가 되는 일은, 삶의 본보기가 되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안달복달하지 않고, 질기게 남은 한 줌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겸허하고 자연스럽게 있는 존재란, 얼마나 희귀한 것일까요. 키키 키린은 죽기 전 딸의 가족과 함께 지냈습니다. “딸이나 사위, 손자들이 내 죽음을 실감”하게 하기 위해서요. “‘사람은 죽는다’라는 걸 명확하게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읽는 동안은 잊고 있었던 그의 죽음은, 책을 덮는 순간 너무나 큰 아쉬움의 감정으로 밀려옵니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그가 연기하는 인물을 볼 수 없겠죠. 죽음이란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삶이 조금 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떻게 죽어갈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게 조금 덜 두려워지기도 하고요.
집을 지을 때, 건축가에게 부탁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혹시 현장에서 설계도와 다른 곳에 구멍을 뚫거나 하는 실수를 하면, 내게 알려달라는 거였죠. 그럴 때 서둘러 부품을 교체하거나 새로 고치기보다는 실수의 흔적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당초 설계보다 재미있는 것이 만들어질지도 모르니까요. 바로 고쳐버리면 실수는 그저 실수로 남지만, 그것으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으면 실수는 실수가 아닌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만사에 ‘꼭 이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고 봐요. 예를 들면 내 얼굴을 보세요. 이건 실수에 의한 작품이라고요(웃음). 적어도 미녀 배우라는 기준에는 미달이죠. 그래도 나는 실수를 만회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지금은 이런 얼굴을 오히려 개성 있다고 말하는 시대지만, 40년 전에는 시녀 배역도 못 맡는 얼굴이었죠.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살아남은 건 실수를 어떻게든 살리려 했기 때문이에요.(17)
방사선 치료 후유증 같긴 한데, 요새 가끔 어깨에서 소리가 나면서 통증이 느껴질 때가 이썽요. 그럴 때 “아프다”라고 하지 않고 “아아 시원하다”라고 해요(웃음). 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사는 재미라는 게 있구나 하고 깨닫는 요즘입니다.
나는 마침 적절한 나이에 암에 걸려서, 여러 의미에서 이걸 유용하게 쓰고 있어요. 뭔가 거절해야 할 때 “암이 심해져서..” 라고 말하면 “아, 네” 하거든요.
병에 걸린 뒤로 나도 조금은 겸허해졌어요.(77)
어릴 적에는 서른 살 먹은 사람을 보면 ‘아아, 저 정도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 분별이 생기겠지’ 하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서른이 되어보니 어릴 때하고 별로 달라진 게 없더라고요. 물건에 집착하거나 누군가를 부러워 하는 마음... 모든 것이요. 그래서 내가 70대 역할을 할 때 생각했던 게, 어떤 노인 상을 만들면 안 되겠다는 거였어요. 지금 내가 느끼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고.
그때 데라우치 긴 역할을 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은, 할머니들이야말로 세상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겁니다. 흔히들 남자는 사회적 명예나 지위 같은 게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데, 여자에게는 그런 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있죠. 바퀴벌레처럼 살아남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아닐까 싶네요. 남자는 그저 혁명을 동경할 뿐이라고요.(117)
“여배우가 그런 짓을 하는 건, 누드가 되는 것보다 부끄러운 거라고”하고 동료한테 혼났습니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틀니를 뺐거든요. 머리도 치렁치렁하니 왠지 기분 나쁜 할머니처럼 보였죠?
내 얼굴에 질렸어요. 고레에다 감독 작품에 나오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제안한 거고요. 난 이제 중늙은이라 가게 문을 닫을 때가 됐습니다.
또 하나, 사람이 늙어서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하고 같이 살 일이 줄어서, 그런 모습을 볼 기회가 없잖아요?
극 중에서 귤을 먹는 장면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잇몸으로 훑은 거예요. 이가 없다는 건 그런 겁니다.(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