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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편적인 것을 만들다.

첫 번째 이야기

디자인은 대중을 위해 존재합니다. 특정 타겟층과 시장을 위한 전략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의 유무에도 상관없이 소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원칙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죠. 같은 연주라도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음색을 내듯 디렉터는 총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의 세심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다양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선 그 문제를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편향적 사고에 빠지는 것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익숙한 순간들의 두려움.


가끔씩 익숙함이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제가 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오랜 시간 경력을 쌓아 자연스러워지고 능수능란해진다는 것이 왜 두렵다는 것인지 의아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럽다'라는 것이 어느 순간 위화감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이 옳은 것인 양 행동하고 사고하는 순간들입니다. 이럴 때면 저도 모르게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기 마련입니다. 디자이너 그리고 디렉터에겐 치명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들이 필요합니다. 본인의 성향과 스타일도 중요하지만 이것에 따른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다름에 대한 인정이 필요합니다. 그저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 공감과 소통이 필요한 것이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완벽하게 타인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다름을 인정한다.


공감을 한다는 것은 곧 '다름을 인정한다'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예컨대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사회 구성의 기본 원리로 다문화주의를 지향합니다. 이는 곧 윤리 상대주의(倫理相對主義)와 조화를 이룹니다. 인종, 종교, 언어와 같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과 함께 공존하기 위해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것이죠. 그래야 비로소 윤리적인 삶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 규범이라는 척도로 다름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동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디자인에서도 이러한 가치관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UX(User Expirence) 디자인은 인터랙션 디자인(Interaction Design), 사용성(Usability), 정보 구조(Information Architecture), 인간공학(Human Factors Engineering) 등의 여러 분야를 포괄하는 사용자 경험 디자인을 말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조형적 의미와 더불어 기능뿐만이 아닌 지각 가능한 모든 면에서 축적하게 하는 총체적 경험을 의미하죠. 그래서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초반 기획단계부터 가이드를 명확히 설정해 디자인을 진행해야 합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fallacy of hasty generalization)라는 것이 있습니다.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세스 중 하나는 레퍼런스(reference) 단계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의 사례 혹은 불확실한 자료만을 가지고 결론을 도출하는 논리적 오류를 뜻합니다. 비교적 정확한 수치와 근거가 존재한다 해도 비슷한 오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경우죠. 한 가지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그중 하나가 젠더(gender) 이슈가 아닐까 합니다. 


남녀의 성을 구분하는 영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성을 구분 짓는 SEX,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을 일컫는 GENDER입니다. 이에 기반한 학문이 젠더학(Gender studies)입니다. 성 정체성이 사회적, 문화적 구성의 결과라는 것을 밝히는 일이죠. 사회적인 성적 차별이 생물학적으로 근거 지어진 것이라는 기존의 통념과 학설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 구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미술사 공부를 해보셨던 분이라면 아실 테지만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이 도상학 분야입니다. 작품의 의미나 모티브를 찾아 해석하는 것을 일컫는 도상학은 미술작품 속에 구현된 이념이나 기원 등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단지 형태만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단순한 장식적 요소와 함축적인 기호를 구별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젠더학에 기초한 개념과 관점이 더해지면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작품의 양면성을 마주하기도 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수도 있죠.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죠. 

그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대우. 


젠더 이슈가 고개를 내밀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바로 페미니즘(feminism)입니다. 

요즘 페미니즘과 관련된 사건들이 디자인 업계에서도 끊이질 않습니다. 그만큼 대중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하지만 이에 반해 상당 부분 페미니즘에 대해 오해하고 잘못된 인식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들 역시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가 아닌 성평등을 주장하는 그냥 인권 운동입니다. 어떠한 권리나 능력, 자질 등에 있어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 제게 직원의 성(性) 비율이 어떠냐고 물으면 가볍게 웃으며 질문에 답변합니다.  

"여자, 남자 없습니다. 그저 디자이너들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실력 좋은 멋진 분들이요"

표면적으로 드러난 성차별 문제들 역시 수없이 많지만 그것만큼 또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 안에서도 불편한 진실들이 많습니다. 바로 자연스럽다는 이데올로기에 갇혀버리는 것이죠. 


이전 글에서도 언급해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그저 디자인과 예술 그리고 술을 사랑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해박한 지식과 깊이를 전달 드릴만큼 성숙하지 못합니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여전히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자위하는 편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름의 거창하지만 작은 신념을 지키고자 공부하는 것이죠.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이제 4살이 된 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태어나니까 아빠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고 디자이너인데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합니다. 동시에 제 딸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이 되길 원하는 바람에서도 그렇습니다. 디자이너가 세상을 바꾸진 못할 수 있지만 세상이 바뀔 계기를 만들 힘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리고 지금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페미니즘 역시 이제 막 태동을 시작한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툴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작된 이 울림이 그리고 피의 흐름이 곳곳에 혈관을 부드럽게 타고 올라가길 소망합니다. 따스한 그 체온이 순환하며 깃들길 원할 뿐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을 만들다. 


UX 디자인은 다른 디자인 분야에 비해 짧은 시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역사와 예술성을 논하기에는 한 줌의 여유도 없을 만큼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른 속도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린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지속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길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디자인에 대한 철학과 이념들은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가장 크리에이티브하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전유물이 아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요. 기능에 국한된 요소가 아닌 아름다운 공간과, 시간이 공존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 시의적절치 못한 생각들일 수도 있지만 별 것 아닌 보편적인 생각들도 그저 몽상적인 바람들일지라도 겹겹이 쌓아 올려 축적된다면 이 축적된 시간과 생각들만큼의 깊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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