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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제가 디자인을 시작하고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뒤늦게 우연히 부족한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전공했던 서양미술사에서 시작이 되었죠.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때 교수님을 통해 젠더학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랑스어: Simone de Beauvoir)는 “한 사람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은 결국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들 남성과 여성은 사회에 의해 구성되며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빗대어 말하면 디자이너가 대상을 고려야 할 때 단순히 분석과 통계치로 환산된 숫자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남성은 파랑 여성은 핑크, 남성은 강함 여성은 연약함 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만을 가져서는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힘듭니다.

기능적인 방법론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통계만으로는 수많은 환경에 의해 변화하고 숨을 쉬며 생각을 하는 인간을 단편적 사고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꾸밈 속에 가려진 본질. 그것을 관찰하고 세심한 눈길로 바라본다는 것.


한 편의 광고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진 = 유튜브 채널 ‘바디폼’ 영상 화면 갈무리) 

영국의 생리대 광고입니다. 일단 이미지만 봐서는 우리나라의 광고와는 사뭇 다르게 보입니다. 생리대 광고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요. ‘피는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없다 (No Blood Should Hold Us Back)’ 광고의 카피 역시 철학적인 냄새가 묻어나는데 역시나 우리나라와는 모든 것이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영상에서는 격렬한 스포츠와 함께 마치 나이키 광고를 보듯 열정과 결의에 가득 찬 모습들과 부상을 당해 흐르는 피가 화면에 비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위엄만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파격적입니다. 남성들은 여러 가지 글과 매체를 접하면서 여성들이 생리를 통해 남다른 고충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다지만 말 그대로 알고만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생리대라는 제품은 여성이 생리적 현상들로 인해 겪는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역할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인식 속에선 마치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깨끗하고 순수한 모습만을 강조하며 여성을 아름다움이란 언어로만 미화시키죠. 우리와 같은 인격체로서의 존중으로 보기엔 타인만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꾸밈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UX분야와는 다르지만 디자인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바라보게 되면 인문학적인 가치가 중요하게 작용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젠더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사례였지만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존중해야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이것에 기초하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시선이라는 출발점은 어떠한 프로젝트도 같을 것입니다. 기술이 우선되고 디자인하는 도구가 발달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란 것이죠. 플랫폼, 브랜딩, 마케팅 위에 사람의 감성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을 통한 최적의 크리에이티브. 이것이 지금 우리가 관심 있게 바라봐야 하는 디자인이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인문학에 대해 상세하게 내용을 다루기에는 제가 가진 견해와 지식은 얕은 수준에 불과합니다. 다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인문학과 디자인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다리를 놓으려는 노력을 기울일 뿐이죠.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조금은 다른 시선과 따뜻함으로 바라보기 위함을 전제로 놓습니다. 분야에 있어 나라마다 다르지만 인문학은 철학과 문학 역사와 예술을 뜻합니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이란 것인데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 으로써 우리가 치열하게 행하고 있는 디자인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이기주 작가님의 언어의 온도란 책을 인용하여 한 가지 적어보겠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 = 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외면하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쪽에 관심이 없어요” 혹은 “뜨거웠던 마음이 어느 순간 시들해졌어요. 아니 차가워졌어요”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일까. 돌이켜보면 관심이 멈추던 순간, 상대를 향한 관찰도 멈췄던 것 같다… -


 뜨끈한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갑작스레 문을 열고 맞이하는 그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파고들어 파르르 사시나무 떨 듯 흠칫하게 되는 순간 같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내가 사랑했던 일에 대해 외면하는 순간 그 너머의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 관심이 멈추는 순간 상대방에 대한 관찰과 배려는 멈추는 것이죠. 무심(無心)한 디자이너가 되는 것입니다.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은 기술도 아니며 트렌드를 흡수하는 능력도 아닙니다. 화려하게 그림을 그려내는 스킬도 아니죠. 누구보다 섬세하게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관찰. 통찰력입니다. 

무심(無心)이 아닌 관심(關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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