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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이론의 균형을 꾀하다.




‘경험은 이론을 앞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때 이 문장에 매료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틀에 박힌 이론보다 경험을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그 경험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더군요. 쳇바퀴 돌 듯 제자리에서 맴도는 기분이었습니다. 늘 바삐 무언가를 했지만 실질적으로 제게 남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불안감에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움직였지만 내실 있게 체득한 것이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슬럼프를 겪으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감각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을 접고 먼저 다양한 디자인 관련 이론과 생각을 접해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그때가 입대를 앞둔 시기였으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정말 안성맞춤이었죠. 12월 23일 입대하면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훈련소에서 보냈던 건 너무 슬펐지만요...


그 이후로 저는 보는 것 못지않게 읽는 것에도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 이론은 물론 세계적인 디렉터 및 디자이너들의 생각, 디자인 콘셉트 과정, 디자인 커뮤니티 속 사람들의 이야기 등 디자인과 관련된 다양한 것들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디자인에 국한된 글만 접했지만 대학에서 서양미술사 강의를 추가로 수강하면서부터는 인문학 서적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인문학을 접했을 때는 어려운 학문이라는 편견이 있었지만 강의를 듣고 책을 읽다 보니 사실 인문학은 결국 우리, 즉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며 다양한 관점으로 사고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맹목적인 생각과 표현기법, 스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다양한 글과 생각을 접하니 제 주변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이너에게 보고 듣고 그리며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설득력 있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많은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익숙한 것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사고하며 바라볼 때 그동안 놓쳤던 것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죠. 더크림유니언에서 진행했던 한화 프리미엄 리조트 ‘르씨엘’ 디자인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르씨엘’ 제안 과정에서 프리미엄 리조트의 ‘품격’을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를 찾기 위해 다양한 사례의 교집합을 찾아보았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마크 로스크의 ‘무제’, 버락 오바마 연설의 51초간의 침묵, 그리고 리움미술관 기획전 ‘시대의 교감.’ 얼핏 보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여백을 통해 품격을 표현했다는 점이며, 이 여백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르씨엘’ 웹사이트 디자인에 설득력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이론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과정에서 시각을 넓히고 관점을 다양화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디자인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디자이너가 이론만 중시해서는 안 되겠죠. 이론만 파고들어 경험이 부족한 디자이너는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그 결과 자칫 사용자를 잊어버리는 디자인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론과 경험의 적절한 균형을 찾을 때 비로소 단순 통계와 사례를 뛰어넘는 통찰력 있는 디자인이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론이 뒷받침된 경험, 그것이 바로 설득력 있는 디자인의 근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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