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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Jan 14. 2022

사랑에 빠지고 싶은 밤

 - 방금 딱 피렌체였지, 그때랑 비슷했지! 살짝 쌀쌀한데 맑고 어둑어둑하고..

 - 그래?

에잇. 김샜다. 같이 호들갑 떨어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이렇게 무던해서야. 척하면 척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쿵하면 너는 짝을 하고. 내가 피렌체를 꺼내면 너는 그날 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아쉬움이 구체적인 생각을 끌고 올수록 저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에잇. 얄미운 마음에 저리 밀어내고 투덜거리다가 이내 밤공기에 신나서 다시 들러붙는다. 그때 딱 이랬다니까. 응. 좋았잖아. 응. 응.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따갑다'였다. 한반도의 습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내게 꽂히는 햇빛은 그야말로 따가웠다. 처음으로 '태양'이라는 단어를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맥반석 오징어의 맥반석이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순조롭게 온 몸이 구워지는 느낌. 이렇게 뜨거우니 태양열로 전기를 만든다는 거구나. 태양열로 격한 환영 박수를 받은 것 기분이 들어 귀까지 멍해졌다. 이 신선한 태양열에 적응하느라 멍하게 땅을 보다가-눈이 부셔서 하늘은 볼 수가 없었다.- 그 잠깐 가만히 서있었다고 기다란 빛의 바늘이 정수리부터 바닥까지 나를 관통해버리는 신선하고 강렬한 따가운 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햇빛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줬다. 나는 고온보다 다습에 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여름만 알던 몸은 그저 더위에 약한 몸이라고 정의되었다가, 이탈리아의 볕을 경험한 몸은 습도가 낮다면 볕이 강할수록 더 신나는 몸이 되었다. 왜 유럽인들이 몸을 태우는지 알 것 같아. 귀를 기울이면 지글지글 혹은 최소한 타닥타닥 소리가 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곤두선 솜털의 소리를 듣기 위해 온 신경을 고막에 집중했다. 그러면 당연히 착각일 어떤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타닥타닥.


나쯤은 간단히 바싹 말려버릴 기세로 존재를 과시하던 열기는 태양이 꺼지면 오싹하리만큼 자취를 감췄다. 종일 달궈진 몸이 적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온 도시가 서늘해지면 으슬으슬한 팔을 쓸면서 잔뜩 어깨를 모으고 발을 종종거렸다. 서늘해지기 시작했다는 건 곧 노을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곧 해가 지겠어. 저기에서 석양을 봐야 하는데! 자리 잡고 저기서 노을 지는 걸 봐야 하는데! 안 그래도 빠른 걸음을 더 빠르게 걸으면서 다리를 건넜다. 내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니 덩달아 몸짓이 급해진 J와 뛰듯이 언덕을 올랐다.


언덕에 오르자마자 저녁을 기다리는 인파가 한가득이다. 다소 정신없는 가격표로 현란한 트럭에서 재빠르게 와인을 한 병 산다. 우리 둘 다 레드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좋아했으므로 트럭 주인이 추천한 것 중 적당히 저렴한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얼른 언덕 끝 담으로 걸음을 내달려 자리를 잡는다. 사진에 예쁘게 안 잡히는 얇디얇은 플라스틱 컵은 저리 치우고, 담 위에 와인병을 세워두고 발갛게 올라오는 석양과 피렌체의 빨간 지붕을 연신 찍어댄다. 하루 종일 어깨를 눌러대던 DSLR은 이럴 때 쓰려고 이고 지고 다녔던 거지. 이런 순간만큼은 카메라가 하나도 무겁지 않다.

사진을 수십 장 찍으니 그제야 신난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 눈물 나게 예쁘다.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눈에 풍경이 들어차니 와인이 아쉽다. 드디어 와인을 따고 잔을 맞댄다. 진짜 예쁘다, 진짜 좋다. 빈약하고 서투른 감탄을 나누면서. 지난 일주일을 함께했던 우리에게 시작의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알려주는 듯한 밤이었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밤이었지. 저물어가는 눈 사위, 땅거미진 언덕. 상쾌한 밤공기. 적당한 와인과 곳곳의 연인들. 알딸딸한 웃음으로 내려가던 어두운 계단. 술 취한 젊음으로 가득하던 광장을 지나 가로등 불빛만 가득하던 골목. 숙소까지 한 블록. 소원 내기. 그런 시작.


그 어리고 예쁜 여름은 정말 사랑스러웠지. 그치. 근데 왜 그걸 지금 바로 떠올리지 못하느냐고. 방금 정말 피렌체의 그 밤의 공기였단 말이야. 또 얄미워져서 저리 밀어내 버리고 혼자 빠른 걸음을 걸으면, 금방 따라와서는 손에 깍지를 낀다. 바싹 붙어서는 미운 손을 꽉 잡고 입술을 비죽이게 된다. 나만 알 거야. 안 알려줄 거야. 지금 얼마나 좋은지 나만 알 거야. 이런 사랑스러운 공기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단 말이야.


새삼스레 어리고 예쁜 밤을 돌려다 새롭게 사랑에 빠지고 싶은 밤. 이런 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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