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해 떠오르는 이것저것을 다듬지 못한 채 주욱 쓰려고 한다.
언젠가 다듬어져 다른 글이 될 예정이다.
*내가 지냈던 집
이사를 자주 다니진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집은 다섯 살 전에 살던 동강, 산 아래 농장처럼 넓던 고흥, 광주 어느 주택단지의 코너 끝에 달린 이층 집과 그곳에서부터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그곳엔 아직 부모님이 지내고 계신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지낸 집 중 내가 기억하는 건 네 곳 정도. 그 후에는 서울에 올라와 구한 첫 자취방, 3개월간 지낸 몰타의 호스텔과, 한 달을 지낸 더블린의 홈스테이 가정, 더블린 시내 중앙의 플랫, 다시 서울로 돌아와 구한 6평 남짓 정사각형 모양의 방, 그리고 동생과 지내기 위해 구한 투룸과 지금 지내고 있는 집. 서울에서는 2년 단위 계약에 묶여 지내는 형편이라 어쩔 수가 없다.
*고흥
그중 가장 오랜 기간 머문 집은 산 아래 농장처럼 넓던 고흥의 집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은 믿지 않지만, 그곳에서는 맨눈으로도 은하수가 보였다. 별이 구름과 섞여 흐르는 것이 보일 정도로 촘촘히 박혀 별자리를 더듬기도 어려울 정도로 별이 맺혔다. 반딧불이도 보고 살았고, 지네에 물린 적도 있다. 계절 냄새가 코에 사정없이 걸렸다. 할머니가 공들여 심은 씨앗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봄, 여름, 가을을 따라 공기에 실린 꽃과 풀의 향이 달랐다. 햇볕과 습도와 풀과 꽃이 만드는 냄새로 나는 봄이 왔구나, 여름이 갔구나, 가을이구나 했다.
내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뱀이다. 아주 가끔 잊을만하면 뱀이 보였고, 뱀이 보이면 봄이 왔구나 했다. 겨울잠에 깬 뱀은 따뜻한 열을 찾아 아스팔트에서 낮잠을 자는 모양인지 내 눈에 띄는 뱀은 대부분 아스팔트 도로 위에 차에 눌려 납작해진 채였다. 죽은 뱀이라도 뱀은 뱀이라, 나는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리 길을 돌아 걷고는 했다. 내 꿈에 뱀이 자주 나오는 것은 분명히 고흥에서 살아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뱀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깔려 드글대는 꿈을 꾸곤 한다. 사실 뱀보다는 그 집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다. 6~7년 간 지낸 그곳은 아직도 꽤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길쭉하게 지어진 우리 집 옆으로 절간 같기도 강당 같기도 한 건물이 한 채. 아빠는 그곳을 작업실로 썼다. 차 서너 대를 주차할 수 있는 마당, 평상, 거기에 이어 붙은 작은 밭. 집을 기준으로 왼쪽 길을 따라 들어가면 할머니가 정성스레 심은 씨앗이 계절마다 꽃을 틔워 길을 냈고, 집 바로 뒷 산으로 이어졌다. 집 앞 짧은 내리막 오른쪽엔 굉장히 큰 땅을 철조망으로 둘러뒀는데. 그 안에 큰 개들이 가끔은 풀어져서, 가끔은 줄에 매어 살았다. 내리막을 내려가 왼쪽으로 가면 크지 않은 닭장과 토끼장이 있었고, 그 옆엔 아주 커다란 감나무와 그보다는 작은 유자나무가 서있었다. 우리 가족은 때가 되면 뒷 산에 올라 밤을 따고, 매실을 따고, 아래 마당에 내려가 감을 따고 유자를 따고 석류를 땄다. 행복했고, 충만했고, 지겨웠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부지런해야 하는 그 생활이.
*광주, 주택
중학생이 될 즈음 진학을 위해 광주로 이사했다. 광주에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말 가족이 되어야 했다. 전라남도 교육청에 소속된 엄마, 아빠는 광주 시내의 학교로 오지 못했고 평일엔 학교에서, 주말엔 광주에서 지냈다. 안 방, 할머니방, 동생 방, 내 방 최소 방만 네 개가 필요한 데다 작은 아빠네도 같이 지내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이층 집이어야 했다. 주말 가족 처지에 놓인 10대 딸과 나이 든 어머니가 염려스러웠던 건지, 대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집에서 매우 불행했다. 주말 부부는 삼 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는 거라던데, 주말 가족은 예외인지. 우리는 겨우 일주일에 이틀을 만나서도 소리 지르고, 화내고, 혼났다.
그 집으로 이사 갈 때부터 마루, 벽지, 소파 전부 아빠 취향으로 맞춰졌다. 특히 마루는 완전히 아빠 취향에 딱 들어맞는 강화 원목이 깔린 거실 바닥엔 곳곳에 패인 자국이 더해졌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한 아빠가 컵이며 리모컨을 던져 생긴 자국이었다. 자타공인 딸바보인 아빠의 사랑이 작용하는 방식이었다. 열은 받고, 차마 누굴 때리지는 못하겠고, 분을 표출하기는 해야겠고. 냅다 손에 있는 걸 던졌다. 대부분 리모컨이었고, 가끔은 핸드폰, 아주 가끔은 컵이었다. 아주 사정없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으니 그 언저리에 서있던 나는 언제든 위험할 수 있었으나 아빠가 온 힘을 다해 발휘한 사랑은 그 과녁이 내가 되지 않는 것에 그쳤다. 누울 맛도 안 들게 딱딱한 마루였는데도 파였으니, 얼마나 온 힘을 다해서 내리쳤을까. 아빠는 그 집에서 얼마나 화가 났길래. 얼마나 그 집이 싫었길래. 조목조목 당신의 취향에 맞춰 꾸며둔 그곳이 어디가 어떻게 미웠길래. 그렇게 세게 물건을 던지고, 소리쳤을까.
*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이제 주택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아빠가 마음 놓고 생떼를 부리는 것도 주택이라 가능한 거였고,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것도 주택이라 그랬다. 할머니가 밤낮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것도 싫었고, 움푹 파인 바닥과 끈적하고 위험한 밤의 망령이 들러붙은. 아무튼 이 집은 싫었다.
쓰레기를 내다 놓으면 치워주는 누군가가 있는, 옆집 신경 쓰느라 함부로 소리도 못 지르는, 몇 분 걸어 나가면 아파트 상가가 나오는. 섬처럼 동떨어져 돌아버릴 것 같은 주택 말고, 옆집 사람이든 누구든 문만 나서면 누구라도 존재하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었다.
* 그나저나 할머니는 어쩜 그렇게 깔끔했을까
내가 깔끔하지 못한 집을 참지 못하는 건 할머니 때문이다. 할머니 손가락에는 늘 한 바퀴 감아진 테이프가 있었다. 집에 먼지가 돌아다니는 꼴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도 봐주는 일 없이 그때 그때 테이프로 주우며 다녔다. 그래서 할머니는 늘 그렇게 등을 숙이고 있었다. 떨어진 머리카락이 있지 않을까, 바닥을 쳐다보느라 항상 구부정한 자세로.
그렇잖아도 마른 할머니는 그 때문에 작아 보였다. 160cm는 훌쩍 넘겨 할머니 중에선 큰 키였는데도.
매일 같이 교복을 벗어도 갈아입을 교복이 빳빳하게 다림질되어 걸려 있고. 뽀송한 수건이 찬장 가득하고, 곰팡이라고는 슨 적도 없는 반질반질한 욕실 타일. 늘 텅텅 비어 있던 싱크대, 먼지 없이 반질반질하던 TV장과 소파. 어쩜 그렇게 할머니는, 그렇게 사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