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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카 Apr 10. 2019

낡은 필름

파랗게 멍든 시간들. 45

오늘은 뭔가 내 안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하루였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대화라는 형식으로 쉼 없이 빠져나왔지만 결국은 못했던 나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한 것이다. 이때까지의 고민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함에 꼭 필요한 것들을 오늘 얻었다.

사실 나에게 남은 기회가 몇 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하고 있다. 그동안 좋았던 기회들을 훌훌 털어 보내었던 기억은 점점 강렬하게 꿈틀대며 나 자신 속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겨나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망설임이라는 형태로 굳어지고 그것들이 쌓이다 보면 결국, 머릿속 사고가 막히게 된다. 나는 또다시 기회를 쉽게 보내게 되겠지.

이 불안들을 없애기 위해서, 아직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이 회사 속의 작업들을 하나씩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이번 프로젝트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렇게 정리하고 정립된 프로세스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다 보면 다 정리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고 정리가 되니, 아직 해가 떠 있는 6시. 이제 6시에는 해가 지질 않는다. 그걸 깨닫고 나서 그림자가 빛이 가지고 있던 흔적들을 집어삼켰고, 내면의 잡생각들이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문득 무엇이 어떻게 되어버렸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왔다. 감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정말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하는 순간 조금 더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어떠한 감정이었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분명 마음속 깊은 자국을 남겨버린 감정임에 틀림없지만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경험이다.

낡은 필름은 수광력이 떨어져서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버린다. 내 감정들 또한 이제는 시간이 흘러 낡아버린 것들이라, 다시금 꺼내 들기엔 무리가 있는 거지. 그렇게 타버린 자국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을 상기한다.

그렇게 힘을 잃어가겠지. 남은 감광제는 힘을 다해 빛을 받아보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 타들어 가겠지. 그리고 결국엔 반가운 어둠에 파묻혀 이 깊은 밤을 보내게 될 거야. 해가 뜨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의 찬 공기를 내 몸 가득 받아들일 거야. 마침내 내 폐에 차올라 목구멍 너머까지 넘어오를 때, 나는 강한 자극을 느끼며 깊은 침묵을 맞이하게 될 거야. 아주 반가운 것이야.

그렇게 한 번 두 번 마음을 다지며  그 위에 무엇인가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되어가다 보면, 나는 스스로가 알지 못한 사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 : 김태현

그림 : 윤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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