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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Nov 14. 2022

세상에 없던 아이디어에 함부로 꽂히면 안 되는 이유

남들은 몰라서 안 했을 것 같냐

“이러한 영화는 분명 역대로 존재한 바가 없었습니다만. 여태 그래야만 했었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지난 2019년 12월, 영국의 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인 디지털 스파이가, 그 해 크리스마스를 강타했던 문제작 ‘캣츠’(Cats)를 리뷰하며 던졌던 멘트입니다. 이 리뷰를 작성한 디지털 스파이의 에디터 이안 샌드웰은 “CG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애초에 줄거리부터가 스크린에 세울 수준이 아니었기에,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캣츠는 영화라 부르기조차 뭣하다”는 평을 남기며 5점 만점에 고작 2점을 매겼습니다.


CG 문제가 뭐냐고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합니다만, 그럼에도 차마 영화를 보시라 권유해 드리긴 뭣하네요. 영화 ‘캣츠’ 中 한 장면./유니버셜 픽처스


캣츠는 상당히 실험적인 영화였습니다. 인간 신체 비율을 그대로 적용한 고양이 묘사, 짐승의 행동 습성을 충실히 반영한 메소드 연기, 서사가 약한 뮤지컬의 스토리라인을 별다른 보강 없이 스크린에 냅다 쑤셔 박는 대담한 시도 등, 기존의 통상적인 제작 문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도전이 영화 곳곳에서 묻어났죠.


하지만 누구도 지나온 바 없는 새 길이라 해서 늘 개척할 만한 가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캣츠 영화판의 경우는 그러했습니다. 관객 대다수는 팔등신 비율로 미끈하게 잘 빠진 털고양이 무리를 썩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배우들이 그 꼴을 하고선 고양이 흉내를 낸답시고 한껏 벌린 가랑이를 긁는 모습을 굳이 고화질로 보고 싶었던 사람도 그리 많진 않았던 듯했습니다. 그러한 씬들이 굵직한 내러티브조차 없이 장장 110분간을 이어지길 원했던 이는 더욱이나 희박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판 캣츠를 보고 나니, 이젠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RTE 아일랜드)”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것도 아닌 셈이죠.


심지어 초기 버전에선 고양이 항문까지 CG로 일일이 묘사했었다 합니다. 개봉 전 이를 지우는 직원까지 따로 고용했었다는군요./유튜브 채널 ‘XVP Comedy’




사람들은 낯선 경험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기업들은 늘 전에 없던 사업 영역을 새로이 개척하고자 노력합니다. 만일 그렇게 내놓은 신선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소비자들의 보편적 욕구를 자극하는 데 성공하면, 경쟁자 하나 없는 무주공산을 한동안 홀로 휩쓸며 독식하는 상쾌한 흥행이 사실상 보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세상에 없던 상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는 것은 늘 유쾌하고도 짜릿한 일이죠./James Mitchell


그러한 연유로 경영자 중에선 ‘세상에 없던 사업모델’ 발굴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는 분들이 종종 눈에 띄곤 합니다. 흔히 ‘잡스병’의 갈래 중 하나로 분류되는 증상인데요. 업계나 시장에서 종래에 마주한 바 없던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르면, 생각을 정리하는 겨를도 없이 델포이에서 신탁이라도 받은 행려자마냥 서비스 구현을 향해 무작정 달리는 것이죠. 


주변에서 실현 가망이나 비용 문제 등을 제기하며 만류한들 대개는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본인은 이미 제2의 잡스로 등극한지 오래며, 어깃장을 놓는 부하들은 식견이 짧고 상상력은 빈곤한 가엾은 소시민으로 비칠 뿐이니까요. 사실 그쯤 되면 쇄도하는 반발마저 훗날 필시 도래할 그의 성공 서사를 윤색하는 데코레이션으로 느껴질 따름입니다. 구태한 자들의 반항을 분연히 뚫고 이룩한 선지자의 업적은 한층 더 고결하고도 아리땁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영화판 캣츠에서 여실히 드러났듯, 가지 않은 길을 내딛는 시도라 해서 성공을 반드시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의욕만 무던히 앞서 변변한 사전 조사나 전문가 의견 청취도 없이 다짜고짜 돌진했다간, 전대미문의 역작인 것은 분명하나 정작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예쁜 쓰레기’나 토해 내기 십상이죠. ‘Nostalgia Critic’ 시리즈로 유명한 리뷰어 더그 워커의 영화판 캣츠 평가 멘트를 빌리자면, ‘굉장히 예술적이고 싶어하는 열망이 모든 방면에서 끔찍하게 실패한’ 결과를 내놓기 일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디어 제안자는, 특히나 떠올린 생각을 밀어붙일 수 있는 입지와 권한이 건실한 유력자라면 더더욱, 천상에서 춤추듯 내려온 본인의 독창적인 발상이 실은 굉장히 하찮고도 시시한 스치는 잡념에 불과할 가능성을 상시 열어 두어야 합니다. 겉모양새는 비록 창창한 블루오션일지라도 실상 그 새파란 짠물 속엔 물고기는커녕 해물 한 쪼가리조차 없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전례 없는 파격이라 생각했던 사업모델이 알고 보니 해당 업계에서 베테랑이나 프로페셔널로 꼽히는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슬쩍 찍어 맛보고선 냅다 뱉었던 개살구 마멀레이드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있을 법한데 없는 것은 대부분 나름의 이유가 존재합니다. 면을 식혀주긴 하지만 너무 무거운 ‘젓가락 선풍기’./5ch


하지만 자신의 ‘획기적인’ 착상에 성급히 도취된 상사를 저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2017년 2월 상장사 직장인 약 1000명을 설문 조사해 발표한 ‘국내 기업의 회의문화 실태와 개선해법’ 보고서에 따르면, 무려 75.6%가 어떤 사안을 두고 회의를 하건 결국엔 ‘상사의 의견대로 결론이 난다’고 응답했던 바가 있습니다. 윗선이 내심 답을 정해 놓고 여는 회의란 결국 구성원 논의라는 절차적 명분을 얻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셈이죠.


이러한 상황에선 절대적인 대화량 따윈 결코 소통 수준과 비례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회의를 수차례 반복했다 해서 논의를 충분히 거쳤다 포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는 옹벽에 대고 읊어 댄 세월이 얼마건 거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확신을 버려야 합니다. 수하들의 이해와 동조를 갈구하기에 앞서, 리더 본인의 ‘참신한 발상’부터 미흡하거나 간과했던 구석이 없는지를 우선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지쳐 나가떨어진 부하들이 마지못한 동의를 표하기까지 아집을 내내 붙들고서 회의와 미팅을 수십 차례 소집하느니, 귀와 마음을 활짝 젖히도록 열고 주변의 진솔한 조언 두어 마디를 새겨듣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높고 대단하고 우수한 사람이건, 세상을 잘못 읽고선 핀트가 어긋난 망상에 섣불리 사로잡힐 위험만큼은 상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출신 인지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계의 태두인 아모스 트버스키 스탠포드대 심리학과 교수도 일찍이 다음과 같이 경고했던 바가 있지 않습니까. “무엇인가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더욱 많은 이야기가, '오늘도 출근중'에서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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