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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 Park Mar 16. 2019

갇힌 자 만이 꿈꿀 수 있는 황야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가 쓴 “죄수(The Prisoner)”라는 시를 보면, 부당하게 사슬에 묶여 통을 당하는 어린 여성의 모습이 나온다. 순결한데도 묶였기에 주름 하나 새겨지지 않는 얼굴을 한. “고통이 주름 하나 남길 수 없고, 슬픔이 그림자 하나 드리울 수 없는(Pain could not trace a line, nor grief a shadow there!)”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육신이 있어 느끼는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것은, 이 육신 속에서의 삶은 짧고 대신 대가로 불멸을 얻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내면에 어린아이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 다들 어린 소년이나 어린 소녀 하나씩은 품고 산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 아이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사랑에 빠졌을 때 이 아이가 돌아오고, 실연당했을 때 마주하게 된다. 어른이 되면서 점차 이 아이가 정처없이 울거나 소리지르거나 할 때 이 아이에게 가서 안아주는 법을 배우면서, 나이 들어가면서 내면의 모사리들이 점차 닳는 것도 알게 된다. 에밀리 브론테의 글은 그 강렬함에 매혹이 되면서도 읽고 돌아선 순간 처연하게 슬퍼진다. 그리고 저 시를 읽었을 때 드디어 알았다. 에밀리는 내면의 아이를 꽁꽁 묶어 두었다는 걸, 그래서 밖으로 터져 나온 아이는 그리도 강렬했다는 걸, 아이와 함께 묶이고 아이와 함께 황야를 질주하는 걸 택해서, 그래서 닳지 못하고 늙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는 걸.


“갇혔다”는 자의식 – 이해는 한다. 빅토리아 시대에 책 읽는 여자로 산다는 의미가 그런 거였으니까. 갇혀도 갇힌 걸 모르면 행복할텐데, 쓸데없이 글을 읽고 의식이 깨면서 갇혔다는 걸 아는 건 고통이니까. 애매모호한 계층으로 태어나 자신의 처지와 세상을 알만큼만 교육을 받은 유휴 인력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힘드니까. 브론테 자매들의 아버지인 패트릭 브론테는 아일랜드의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대장장이와 방직공의 도제로 일하다가 그 비상한 머리와 강철 같은 의지로 후원을 받아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캠브리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영국 성공회의 목사가 되어서 종신 교구로 지정을 받은 곳이 바로, 브론테 자매들이 자란 웨스트 요크셔(West Yorkshire)의 하워스(Haworth)이다. 아주 외지고 삭풍이 부는 황야, 거친 잡초와 작은 야생화들만 자라는 황야인 heath에 자리한 목사관에서 에밀리를 비롯한 어린 브론테들이 자랐다. 이모인 엘리자베스 브랜웰이 동생의 산후 조리를 도우러 왔다가 너무 외져서 힘들다고 하루라도 빨리 본가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곳이기도 하다.

삭풍이 부는 외딴 황야, 거기 자리 잡은 목사관과 그 옆의 교회, 그리고 교회 옆이라면 당연히 있는 묘지, 이게 에밀리가 자란 환경이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세 살에 불과 몇 개월 된 여동생 앤을 남기고 병을 얻어 죽었다. 여섯 아이 양육이 너무 벅찼던 패트릭은 처음에는 위에 둘, 마리아와 엘리자베스, 다음엔 샬럿과 에밀리를 돈 없는 목회자들의 딸들을 위한 기숙학교로 보내는데, 나중에 샬럿이 <제인 에어>에서 로우드 스쿨의 모델로 삼았던 그 열악한 시설에서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는 병을 얻어 죽는다. 여섯 살에 그 학교로 보내졌던 에밀리는 놀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샬럿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이후 죽 언니 샬럿, 오빠인 브랜웰, 동생인 앤과 함께 넷이 아버지 서재에서 읽고 쓰며 자라났다.


넷은 함께 가상의 왕국 이야기를 쓰며 그에 대한 이야기와 시들을 지었는데, 샬럿과 브랜웰이 앙그리아(Angria)이야기를 쓰고, 에밀리와 앤은 태평양에 위치한 곤돌(Gondol) 왕국 이야기를 썼다. 상상해보라 – 거친 황야에 무덤가 집. 어머니 없이 자매들도 죽고 남은 형제 자매 넷이 둘러앉아 만든 허구의 세계를.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현실을 버티는 힘을 얻는 외로운 사람들을.


에밀리는 아버지 패트릭이 가장 총애하던 딸이었다. 살아남은 넷 중 어릴 때부터 총명함을 보여서 아버지가 주목했던 듯싶다. 하지만, 그 엄격하고 똑똑한 아버지의 인정이 ‘여자’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달까. 지참금이 없으면 시집가기 힘들었던 시대의 영국에서 딸들 지참금을 제대로 줄 수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건 집에서 배웠건 글을 읽고 써서 똑똑한 여자라는 건 불행이었다. 차라리 노동자 계급이었으면, 밭에서 일을 하건 공장에서 일을 하건 더 나아가 몸을 팔건, 몸을 굴려서 밥벌이를 할 수 있었지만, 목회자의 딸로 지켜야 할 온갖 사회적 체면과 종교적인 규율이 있는 여자들은 그럴 수도 없었다. 배운 데다가 똑똑한 귀족의 딸로 태어나면 물려받은 돈으로 무엇이든 해볼 수는 있었겠지만, 가난한 목회자의 딸은 가정교사가 되어 자기 밥벌이를 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밥벌이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에밀리의 경우 그 특유의 비사교적인 성격으로 기숙학교 교사나 가정교사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학교의 교사로 갔었으나 6개월 후에 돌아왔고, 가정 교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학교를 열어보자는 꿈으로 언니 샬럿과 벨기에에 가서 유학을 하기도 했으나 에밀리는 어머니 대신 양육을 맡았던 이모가 죽은 후, 하워스로 돌아와 다시 벨기에로 돌아가지 않았다. 샬럿은 더 공부를 하고 돌아와 학교를 열려고 했으나, 황량하고 외진 하워쓰에 있는 학교로 오겠다는 학생들은 없어서 학교를 열어 선생님이 되는 유일한 가능성도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남은 일이라고는 글 쓰는 일 밖에 없고, 갈 곳이라고는 황야의 작은 집 밖에 없는 여자들이 모여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미 세상 구석에서 살고 있으나 더 이상 내몰릴 수 없는 구석까지 내몰리면 드디어 글을 쓸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셋은 그렇게 글을 써서 글을 처음 보낼 때에도 여자 이름으로 보내지 못한다. 1846년 이들이 낸 시집에서는 샬럿, 에밀리, 앤은 각각 커리어 벨(Currer), 엘리스 벨(Elis Bell) , 액톤 벨 (Acton Bell)이라는 남자 이름을 쓴다. 1847년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을 내고, 1848년 오빠인 브랜웰이 죽고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책이 어떤 반향을 사회에 남기는지도 채 보지 못하고 서른 삶의 나이로 폐렴에 걸렸다가 눈을 감는다.


“천국은 내겐 집이 아닌 것 같아. 지상으로 돌아오겠다고 우느라 내 심장을 망가뜨려 버렸어. 천사들이 너무도 화가 나서 나를 ‘폭풍의 언덕’ 꼭대기 황야 중간에 나를 패대기쳐 버렸지. 거기서 난 기뻐서 흐느끼며 잠에서 깼어. (폭풍의 언덕 9장)

어떤 영화에서 보면 다른 사람의 꿈 속에 접속해 들어가 병든 아이의 모습의 내면을 치유하는 치료 방법을 그린다.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트라우마로 내면에 갇혀서 썪은 나무등걸 안에 웅크려 괴물처럼 변한 아이를 나무 밖으로 끌어내는 일을 한다. 이 영화에서 알 수 있는 건, 우리 내면의 세계에는 사막이든 황야이든 어찌했건 지리적인 풍경이 하나씩 다 담겨있다는 점이다. 바싹 마른 거대한 사막 같은 내면을 가진 아이, 거기 남아있는 마른 나무 등걸 안에 흉한 모습으로 웅크린 아이, 이런 풍경을 상상해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에밀리늘 한 번 보라. 삭풍이 몰아치는 황야를 떠돌아다니는 야생의 아이로 내면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난 다시 어린 계집아이였으면 좋겠어. 반쯤 야생에 고집쟁이에 자유로운 계집아이 말이야. (I wish I were a girl again, half savage and hardy, and free.) (폭풍의 언덕 12장)"


그렇게,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내면 속의 풍경이다. 그 척박하고 거친 풍경에서 하는 사랑이란, 강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척박하고 추우면 온기에 더 매달릴 수 밖에 없으니까 그 사랑은 제법 강렬해진다. 더군다나 현실에서는 남자와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여자의 사랑은, 목숨을 걸고 죽음을 끌어다 대비시키면서 더더욱 강렬해진다. 이 책의 서사가 가진 힘이라는 게 이러한 강렬함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구석에 갇힌 자신의 모습이 바로 쇠사슬에 묶인 어린 여성의 모습이고, 억눌리고 갈 곳이 없는 욕망, 억눌려서 더더욱 강렬해진 욕망이 상상의 세계 속에 탁 트인 거친 황야를 만들고 거기에서 헤매는 야생의 아이 같은 여자와 죽음을 넘어서서 강렬히 사랑하는 남자를 만들어 내었으니까.


거꾸로 온 세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남자가 사랑에 대해 쓴 글들을 한 번 생각해보면, 에밀리가 쓴 글이 가진 힘이 왜 어마무시한지도 알 수 있다. 갇혀보지 않은 사람이 모르는 억눌려 터지는 힘을 온 세상의 바다와 대륙을 헤집고 다니며 온갖 피부색의 여자들을 섭렵하며 사랑입네 하는 남자들이 강렬함에 대해 뭘 안다고 말이지. 글재주를 지녔으니 글로 어떤 여자로 희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희롱하고 섭렵하는 것이 예술하는 이에게 허용된 자유라 생각하는 남자들이, 단 한 번도 단 한 명의 남자의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코르셋으로 자신을 묶고 가두며 오로지 상상의 황야에서만 참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내달릴 수 있는 여자의 성정이 얼마나 거칠게 터져나올 수 있는지,  그 여자가 어떤 힘으로 사랑으로 하고 글을 쓰고, 그렇게 다 쏟아 붓고는 마치 모든 에너지가 소진이 된 듯 죽는지 알 리가 없지 말이다.

오빠인 브랜웰하고 여실히 대비가 되면서 사실 에밀리의 삶이, 아니 브랜웰의 삶이 더 비극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유일한 아들로 철저하게 자수성가한 엄격한 아버지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으나, 절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칠 수 없었던 아들이었다. 남자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버지와 친척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결국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술 주정뱅이가 되어 죽어버린 오빠에 비하면 누가 더 비극적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할 능력이 없었던 남자와, 여자라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두어 개 뿐인 세상에서 그 이상을 해낼 능력이 있는 여자 중에 누가 더 힘겨웠을까. 그리고 마치 저주받은 샴쌍동이처럼, 하나가 죽자 다른 하나도 죽어버렸다. 능력이 없어서 슬펐던 아들이 먼저 죽고, 채 석 달이 안되어서 능력이 있어도 펼칠 세상이 없었던 딸이 뒤를 이었다.


패트릭 브론테가 가장 오래 살았다. 그 강철 같은 의지로, 자식들 중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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