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ce Park Jan 21. 2020

Moment-maker

감정 톺아보기의 중요성 

가끔 나이들어서 감정, 특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나이 많은 남성들을 보면 사실 마음 깊숙히 저건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부터 시작해 화내는 나이많은 남자들을 오랫동안 보며 곰곰히 생각했지만, 요새에는 남녀노소 할 것없이 분노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서 이게 또 비단 나이 많은 남자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이많은 남자들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지점은,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감정의 채널이 고착되기 전에 감정들을 다양하게 분화시켜서 느껴보고 체험해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남자들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억압을 더 많이 받아서 그러하고, 남자들이 만든 가부장 마초 문화가 감정을 굉장히 억압하는 측면이 있다. 가장 쉬운 감정이 사실 분노다.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파워풀한 감정 표현이지만, 사실 분노 뒤에는 분화되지 않은 많은 감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게 슬프다.


감정의 분화를 체험해보지 못하고 늙은 사람들은, 나이들어서 사회적 지위와 권력 관계에서 물러나 사람들과의 관계만 남을 때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른다. 여러가지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고 감싸안아야 할 때에, 표현할 줄 아는 감정의 채널이 오로지 분노 채널만 남아있어서 그것 밖에 쓸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노화에 대해 영화 <유스>에서는 생의 마지막에 남는 건 오로지 '감정'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감정에 대한 추억'이 남는 거라고 하더라. 젊은 시절에 풍성하게 감정을 분화해가며 다양한 감정을 알알히 느끼고 표현하고 나눈 이들은, 노년이 되어서 그 추억으로 풍성하게 살아간다고.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젊은 시절에 길을 내어놓은 감정의 통로들이 노년에 남아서 그 길을 더듬으며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건, 내가 살면서 감정을 두고 엄청나게 많이 고생을 하기 때문에 많이 생각해본 것 같다. 난 늘 양가적이 두 면이 있다. 굉장히 이성적이기도 한데 굉장히 감정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 감정을 늘 차단하는 기제를 쓴다. 꽉꽉 눌러서 의식 아래로 눌러다져진 에너지를 나도 아는데, 그 중 가장 쉽게 표출할 수 있는 감정은 분노더라. 분노는 표현하기도 쉬운 만큼 가라앉히기도 쉬워서 외려 괜찮다. 분노의 해악을 알게되어 깨우치면 이건 뜸 들여 말하기, 한숨 고르고 대응하기, 파워워킹하며 혼자 욕하기 등등의 방법으로 긍정적으로 푸는 게 많이 가능하다. 정말로 꺼내기 힘든 감정은 슬픔이다. 잘 울지 못한다. 번아웃으로 쓰러져 기어다니고 싶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울 수 있었다. 운동을 백날 해보았자 별 효과가 없는 이유는, 내가 굉장히 예민한다데가 모든 스트레스에 대한 감정을 다 의식 아래로 눌러 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눌린 감정들은 모두 신체로 터져나와 온 몸이 굳는다. 이번에 신경을 둔하게 하는 약을 처방 받아 먹으면서 근막이 들러붙는 고통이 많이 둔해지는 그런 효과를 보며, 기가 차서 웃고 있다. 음, 나는 강하고 싶은 너무 예민한 인간이라서 나를 이렇게 혹독하게 대하는구나 싶다.

이런 걸 겪다보니, 남자들이 어떠한지 대충 알겠다. 위계질서와 권력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강해야 하는 많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푸대접하는지 알것도 같다. 더불어서, 분노가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어 횡행하는 세대에, 왜 우리는 감정을 한껏 누리지 못하고 사는걸까 그런 고민을 해본다.


행복하고 싶은가. 성공이 아니라 행복이 삶의 목표라면, 사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한껏 슬프고 기쁘고 그래야 한다. 분노와 절망과 우울에 지배당하지 않고, 삶의 여정을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길이라고 생각한다면,더 늙기 전에 순간순간을 느껴야 할 것 같다. 기쁨과 희망과 설렘에 대한 강박은 조증을 낳는 것 같으니 이 또한 경계해야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에 대한 추억이 어두운 길을 걸을 때에 작은 불빛이 되어 인도하는 것 또한 맞다.


순간을 느끼는 힘이 중요하고, 내게 와서 순간을 만들어주는 존재들이 그래서 소중하다. 작은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우리가 그리 아끼는 이유는 이 존재들이 순간을 만들어주는 moment maker여서가 아닐까 싶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워서라도 그런 순간들을 잡고 사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는 나는 누구에겐가 가서 그 사람의 순간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망은 소망이고, 나는 요새 내 난관에서 나를 건지는 것도 버겨워하며 산다. 그래서 소망을 더 강렬하게 하는지도 지도 모르겠다. 나를 기어코 어둠에서 건져내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