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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화나무 May 09. 2019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긴  시간이 필요한 한약처럼

약령시(藥令市)하면 대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역사적인 근거를 살펴봐도 효종 연간에 어명으로 약령시가 설치된 후 전주, 원주와 함께 3대 약령시로 불려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대구만이 약령시의 맥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온 것을 생각하면 ‘약령시=대구’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효종 당시 설치됐던 위치에서 자리를 옮겼으며 한때 시장이 폐쇄되어 시간적으로도 단절의 기간을 겪었지만 오늘날까지도 대구약령시는 약전골목이라는 생활밀착형 호칭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비교하자면 ‘서울약령시’는 상대적으로 낯선 명칭이다. 우선 역사가 짧다. 멀리 잡아도 1960년 전후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본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청량리역이 1959년에 신축 되고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이 1968년에 문을 여는 등 경기, 강원 지역 농‧임산물의 서울행 물류 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시장의 규모는 계속 커져갔고, 1970년대에는 종로의 약재상과 한의원이 혼잡과 지가상승을 피해 이곳으로 몰리면서 한약재 집산지의 원형이 완성된다. 이후, 전국 한약재의 70%가 유통되는 약재시장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지만 정작 약령시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서울약령시 지정 표지석


이곳이 전국 최대의 약령시가 되는 데에 유통의 이점 말고 다른 요인은 없었을까?

이 지역에 있었던 어떤 기관을 지목하며 무려 600년의 연원을 언급하기도 한다. 서울한방진흥센터(동대문구립)에서는 서울약령시의 역사적 유래를 보제원普濟院에서 찾는다. 보제원은 병든 백성들을 치료하고 음식을 나누어주던 구호기관으로서 조선조 초기 이 근방에 설치되어 19세기말까지 근 500년간 운영되던 곳이다. 의료 행위 시 한약재가 사용됐을 것이므로 약령시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너무 갖다붙인 감이 있다.


박물관 2층 전시실의 보제원 현판


1층 로비에 보제원 축소 모형. 크기로 보아 10분의 1 사이즈로 보인다.


서울약령시에는 한의원과 한약방, 약재상, 햔약조제소, 한약유통업체 등을 아울러 1천여 개를 헤아리는 관련 업소가 몰려있다. 대부분 3층 미만의 저층 건물에 입주해있지만 오피스텔 형태의 고층 건물을 이룬 곳도 많다.

동의보감타워, 한방천하, 불로장생타워 등 이 근방 큰 빌딩은 대개 이런 이름이다. 한의약이 사람들의 인식 속 어느 지점에 있는지-전문용어로 브랜드 포지셔닝이 되어 있는지-를 말해주는 지표다.

건물들 사이로 한옥 양식의 커다란 문이 눈에 띈다. 일직선 기둥 위에 맞배지붕을 얹고 서울약령시라는 현판을 붙인 일주문이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한의약의 세계로 들어서는 경계인 셈이다.


서울약령시 입구 역할을 하는 일주문


이곳에서 250미터쯤 들어가면 오른편 길가에 한옥 외관의 3층짜리 팔작지붕 건물이 보인다. 각진 철근콘크리트에 한옥 형태를 단순히 올려놓은, 흔한 형태의 퓨전 건물이다.

한옥 건축의 특징은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조화로운 일원이 되는 것인데 이 거대한 한옥도 왠지 주변의 콘크리트 건물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칭찬인가 비아냥인가? 말 하는 나도 잘 모르겠다.


누각을 얹은 성곽 같은 느낌의 서울한방진흥센터. 거대해서 그럴까? 건물의 상징적인 부위는 한옥이지만 전체적으로 한옥의 느낌은 약하다. 2017년에 지은 새 건물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회색빛 도심 풍경과 그런대로 조화를 이룬다.


서울한방진흥센터 건물의 2층이 한의약박물관이다. 1층에도 보제원 모형과 의상체험실, 영상체험실, 그밖의 관람 편의 시설이 마련돼 있지만 관람료를 받는 본격 전시 공간은 2층이다. 3층은 사무실과 강당, 한방진료실, 약선음식체험관 등의 유관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실의 맨 처음은 한의학의 역사 코너이다. 신화시대의 쑥과 마늘에서 먼 기원을 찾고 있으며, 중국에서 유입하여 일본에 전파하는 수준을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면 ‘우리 의약’이라는 뜻의 향약(鄕藥)의 개념이 생겨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의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1250년)이 이 시기에 지어진다. 조선시대에는 더 많은 의서가 간행되면서 향약의 정체성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조선 중기에는 허준, 후기에는 이제마가 등장하여 각각 동의보감(東醫寶鑑)과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으로 대표되는 우리 의학의 독자성을 완성한다. 이를 漢醫學과 구별하여 韓醫學이라 부르고 있지만 정식 표기는 198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변경된다.


가운데 스탠딩패널을 두고 오른편을 입구, 왼편을 출구로 구성한 반시계방향 동선이다.


진열장 속 유물과 네임택, 벽면의 설명 패널로 구성된 가장 전형적인 연출이다.


개별 진열장 내에 온습도계가 있는 것을 보면 진품 서적도 섞여있는 듯하다.


이어지는 코너는 한의약‧학 기구를 전시한 공간이다. 약재의 채취에서 측정, 혼합, 분쇄, 가공, 제조, 저장에 이르는 각 과정별 도구가 앞쪽 역사 코너와 같은 방식(진열장과 패널)으로 전시돼 있다. 침을 담아두는 침통은 한의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위상 때문인지 기구 코너 내에서도 별도의 공간으로 구성해놓고 있다.

약재 코너도 꽤 넓다. 약재의 상당 부분은 본초(本草)라 불리는 식물성 약재이다. 식물성 외에 웅담, 녹용‧녹각, 사향, 우황, 생식기(腎) 등 동물성 약재는 익숙하지만 유황, 금박, 활석, 구리 등 광물성 약재는 꽤나 낯설다.


식물성 약재를 표본 형태로 전시한 코너


진열장 전시는 여기까지다. 다음 코너는 약초마을 이야기. 오른편에서 왼편 순으로 약초채취, 약초가공, 약초판매, 한의원, 한약달이기로 나누어 연속된 하나의 디오라마로 구성하였다. 실 사이즈로 연출한 한약방 모형까지 보고나면 오브제를 활용하는 전시는 모두 끝난다.


약초마을이야기 디오라마


한약방 연출. 실제 크기 모형으로 재현했지만 천장 높이의 한계(육안으로 3000 정도)로 모형 건물의 높이는 다소 낮다.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전시는 서울약령시의 역사와 위상, 그리고 실생활 속의 한의학과 한방 상식으로 구성한 코너이다. 대단히 많은 설명을 적어 넣은 패널이 너른 공간을 한껏 차지하고 있지만 공간을 겨우겨우 힘겹게 채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육안으로 200평이 안 돼 보이는 공간에 한의약‧학과 관련하여 없는 내용이 없다. 다만, 작은 글씨로 너무 많은 내용을 빽빽하게 기록하는 바람에 가독성은 많이 떨어진다. 한의약‧학을 공부하기 위한 사람에게는 지식의 보고나 다름없지만 가독성을 고려한다면 전시 연출이 너무나 1차원적이다. 박물관 측에서는 흥미보다 학습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실에 적혀있는 전체 활자를 모두 읽는 관람객이 혹시라도 있다면, 관람에 2시간 남짓이 소요될 것이다.

내용의 밀도로 보자면 이보다 더 알찬(?)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방(韓方)이 그런 것처럼 약효에 이를 때까지는 인내심이 필요한,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다.


전시실이라기보다는 의자 없는 회의실에 가깝다.


보고서의 한 페이지가 세로 2미터 높이의 패널에 담겼다.


이 박물관이 내세우는 컨셉은 Wellness다. 발병 이후의 치료보다는 조화를 통한 건강 유지가 한의약‧학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전시 공간 바깥 쪽에 설치된 족욕체험장


한의약박물관이라면 으레 있다고 짐작할 수 있는 등신대 포토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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