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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복 Nov 05. 2024

기막힌 타이밍 6

해외여행 중에 OOO을 마주칠 확률

전부터 가졌던 로망 중 한 가지가 봄에 일본 여행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토에 있는 ‘철학의 길’을 찾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 아래를 천천히 걷는 일. 철학자처럼.


그래서, 휴직 후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이 3월의 교토 여행이었다. 평소라면 꿈꿀 수 없는, 바쁘디 바쁜 3월에 해외여행을 간다는 건 금단의 열매를 손에 넣는 것처럼 상징적 의미도 컸으니, 휴직 첫 이벤트로도 딱 알맞았다. 3월 마지막주로 예약을 잡아두고 여행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를 보게 됐는데 올해 일본의 벚꽃이 예년보다 일찍 필 거라나. 가뜩이나 숙소도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는데 잘됐다 싶어서 여행 일정을 한 주 앞당겼다. 위약금을 몇만 원 물기까지 했지만 로망인데 어쩌랴.


하지만, 결국 로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의 벚꽃이 필 기미도 보이지 않던 때, 나는 일본으로 떠났다. 어쩐지 교토에도 벚꽃이 아직 안 피었을 것 같은데. 여행 일정을 너무 성급하게 바꾼 건가 조바심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간사이 공항에서 교토로 넘어가기 위해 하루카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창밖 풍경을 통해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벚꽃이 전혀 피지 않았다.


규칙적인 소음을 내며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나는 ‘아, 내가 무슨 일을 겪으려고 그렇게 급하게 일정을 바꾸었던가.’ 탄식하다가도 ‘아니야 다 이유가 있겠지,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게 되어 있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내게 벌어진 작은 불운을 받아들였다.


집을 나선 지 한참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지쳐서 그냥 쉬려다가 어쩐지 아까운 마음에 간단히 짐만 풀고 밖으로 나왔다. 일정을 당기면서 훨씬 더 좋은 위치에 숙소를 잡은 덕에 조금만 걸어도 교토의 중심 번화가였다. 나는 목적 없이 걸었다. 내가 휴직을 하고, 3월에, 이렇게 혼자, 해외여행을 왔구나를 만끽하려는 것이 그 저녁 산책의 이유였다.


빠른 걸음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이미 해가 저문 지는 한참이지만 백화점과 명품샵들이 즐비한 거리라서 불빛이 환했다. 교토는 역시 관광 도시답게 외국인이 정말 많았다. 확연히 다른 외양을 가진 백인 여행객들이 많아서 나 같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을 분위기였다. 여행 기분을 내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는 얼굴이 보였다.


대로 중간의 샛길에서 막 튀어나와서 마주 걸어오고 있는 한 쌍의 남녀.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처음에는 ‘참 닮았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어? 어? 맞나?


그는 나의 전 남자 친구이자 무려 첫사랑이었다!

스물한 살 때 처음 만났고 나를 웃고 울게 했던.


행인들이 많은 대로였고, 상대가 나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살짝 방향을 틀어서 길가로 걸었다. 알은체를 하고 싶지 않았던 건 그냥 본능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 옛날 연연했던 시간들의 반작용인지 이젠 조금의 영향도 받고 싶지 않았다.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마침내 스쳐 지나갔을 때도 나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더 가고 싶은 데는 없어?”


일행에게 건네는 소리였다. 어? 저 목소리… 저 말투.. 맞는 것 같은데.


너무 놀랐다. 어떻게 서울도 아니고 교토의 한복판에서 이렇게 마주칠 수가 있지? 같은 공간 안에 일정시간 머문 것도 아니고 걷다가 지나쳐간 것이니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이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뒤돌아 달려가서 확실하게 확인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에이 굳이 뭘…


흥미로웠던 건 옆에 있던 여성이 내가 예전에 그의 싸이월드에서 훔쳐봤던 그의 부인이 아니라는 점. 출장을 왔나? 이혼을 했나? 여자 친구일까? 해결되지 않을 호기심만 잔뜩 안은 채로 다시 한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아까 기차 안에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쟤를 이렇게 마주치려고 갑자기 일정을 바꿔서 벚꽃도 안 핀 교토에 와버렸구나. 재밌네. 재밌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보다 더한 기막힌 타이밍을 살면서 또 겪을 수 있을까? 그래서 써봤다. (20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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